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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5.25 12:37

[커피벨트를 가다] 소비 변화가 커피농가의 가난 대물림을 끊어낼 수 있을까

등록 : 2020.05.25 12:37

<29회> 커피 본래의 가치를 추구하는 커피의 시대 도래

서울의 한 테이크 아웃 커피 전문점에서 바리스타가 커피를 내리고 있다. 짧은 기간 폭발적으로 늘어난 한국의 커피 전문점 시장은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의 규모로 성장했다. 최상기씨 제공

아침 7시.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도심의 한 길 모퉁이 카페에 불이 켜진다. 이내 칙칙 거리거나 달그락거리는 소리, 웅웅 기계 돌아가는 소리, 뭔가를 탁탁 때리는 소리 등 분주함이 느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길가로 향해 난 문이 활짝 열린다.

아침 출근길 사람들은 대개 무심히 이 카페 앞을 지나치지만, 몇몇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카페 앞에 멈춰 선다. 아메리카노 아니면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한잔씩 받아 들고는 총총 가던 길을 간다. 드물지만 자리에 서서 에스프레소를 두, 세 모금 홀짝 마시고 이내 사라지는 사람도 있다. 눈치 빠른 바리스타는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 안쪽의 동료에게 메뉴를 알린다. 손님이 무엇을 주문할 지 잘 알기 때문이다.

아침에 커피가 아닌 다른 음료를 주문하는 사람은 드물다. 커피의 맛과 향, 그리고 적당한 카페인이 도파민을 자극하는데 이는 마치 아침에 일어나면 기지개를 켜고 하품하듯 습관처럼 커피를 찾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출근길 커피 한 잔의 역할은 크다. 물론 커피를 사서 들고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커피 한 잔에 대한 의미를 깊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른다. 아마도 그날 처리해야 할 일들이나 만나야 할 거래처 사람, 어젯밤 늦은 시간까지 친구와 나누었던 이야기, 휴가지에 대한 고민, 퇴직하는 상사에게 줄 선물 등 사람마다 다양한 생각들로 가득할 뿐 이따금씩 한 모금 홀짝이는 커피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여러 생각을 하는 동시에 가쁜 숨을 몰아 쉬거나,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는 것 같다.

이렇게 몸 속으로 들어간 커피는, 정확히 말해 커피 안에 용해되거나 부유하는 카페인, 클로로겐산과 같은 폴리페놀 화합물, 유기 아미노산과 그 밖의 다양한 지질과 수용성 성분은 위에서 흡수가 되고, 빠른 속도로 혈류를 통해 온 몸의 감각 세포에 이른다.

특히, 커피 속에 든 카페인은 아데노신을 억제하고, 중추 신경을 자극하며, 뇌의 각성을 유지시킨다. 카페인은 니코틴, 모르핀, 코카인과 같이 자연적으로 생겨난 알칼로이드 향정신성 물질 중 거의 유일하게 섭취가 허용되고, 때로는 장려되기도 하는 물질이다. 아침 출근길에 커피를 사서 들고 가는 사람들은 카페인의 속성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 때문이다.

하지만 커피 성분의 1%를 차지하는 카페인을 섭취하기 위해 커피를 마시는 것은 아니다. 만약 카페인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고농도 카페인 음료나, 정제 형태의 순수 카페인을 삼키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커피의 달콤하고도 쌉싸름한 풍미, 입 안에 들어올 때 함께 느껴지는 온기와 코끝을 자극하는 아로마가 어우러지는 부드러운 만족감. 이런 커피의 복합적인 향미가 전달하는 위로와 정서적 만족감이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게 하는 강력한 요인으로 더해진다.

19세기 유럽과, 20세기 서구사회를 거쳐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는 지구인이 가장 사랑하는 음료는 커피다. 커피는 밥과 빵 등 식문화가 다른 사회에서도 식사 후에 식탁을 점령하고, 국가간 빈부의 차이와 이념에 상관없이 모든 대륙에서 강력한 라이벌인 차(茶)를 누르고 온 지구적 사랑을 받는 음료가 됐다.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과거를 돌이켜보면 한국전쟁 이후 반 세기 동안 우리 사회는 전통적인 차 문화를 잃어버린 대신 전쟁이 남기고 간 달콤한 인스턴트 커피의 매력에 빠졌다. 커피의 정의 자체가 왜곡돼 있었던 시기. 간편한 인스턴트 커피는 고도 성장기 우리 나라 사람들의 고달픈 삶과 성장통의 아픔을 위로하는 달콤한 모르핀이었다.

이후 다방과 카페로 이어지는 사교의 공간에서 커피는 부가적이고 주변적인 역할로 자리해 왔다. 숨가쁜 일상에서 잠시 한 숨 돌리며 쉴 수 있는 공간, 누군가와 앉아서 대화할 수 있는 공간, 정보를 나누고, 은밀한 문서들이 오가는 테이블 위에 커피가 놓여 있었다. 도시 사람들은 만남을 위한 공간을 필요로 했고, 공간을 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커피를 주문했다. 이렇게 커피는 단절사회에서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기능했다. 때마침 신자본주의의 총아로 급부상한 프랜차이즈 모델은 전 세계 유례없는 독특한 카페 문화를 양산해냈다.

하지만 최근 국내 커피시장의 급격한 외형 확장과 더불어 커피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커피는 주변에서 중심적 위치로 격상되고 있다. 이는 공간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 탓도 크다. 도심이 분산되고 건물의 고층화 등으로 사무공간이 넓어지면서 공간에 대한 아쉬움이 줄어들었다. 여기에 더해 많은 사회적 기능들이 온라인이나 모바일로 대체됐다. 사회적 공간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 반면, 급격히 늘어난 커피전문점은 공간의 공급을 크게 키웠다. 수 십년 동안 카페의 중심을 공간이 차지해왔지만, 적어도 도심에서의 공간은 더 이상 커피 소비자들의 선택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가 아니게 된 것이다.

바야흐로 커피의 시대가 왔다. 과거 인스턴트 커피로 인해 기형적인 차문화를 형성하고, 압축 성장 시대의 다방과 카페에서 주변부를 차지한 것과 달리 커피 본래의 가치를 추구하는 커피의 시대가 도래했다. 사회적 관계를 위한 도구적, 형식적 역할에서 개인과 가정의 생활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소비자들은 커피 시장에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고, 산업 생태계를 바꾸고 있다. 커피의 품질을 나누고, 좋은 커피가 주는 감성적, 심미적 의미와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소비자들이 먼저 일으킨 변화는 새로운 물결이 되어 경제적 셈법에 집중하던 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다. 국내 커피산업의 제 3의 물결, 스페셜티 커피의 바람이다.

브라질 한 커피 수출업체 직원들이 커피를 선별하기 위한 테이스팅을 하고 있다. 전 세계 커피를 사고 파는 전문가들은 좋은 커피를 찾기 위해 커핑(향미평가)을 일상적으로 한다. 최상기씨 제공

스페셜티 커피란 개념은 이미 40년 전부터 생겨나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꽤 큰 시장을 차지하고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에는 커피 애호가가 아니라면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단어일지 모른다. 처음에는 산지의 기후 특성으로 인해 특별한 향미를 나타내는 커피 정도로 정의되던 이 용어는 최근에는 보통의 커피에 비해 품질에서 독특한 차이가 있고, 우수하다고 판단하는 커피로 의미의 폭이 확대되었다. 일본의 커피협회(SCAJ)는 스페셜티 커피를 높은 품질의 맛있는 커피로 단순하게 정의 내리고 있다.

마치 프랑스 와인에서 최상품 등급의 그랑 크뤼(Grand Cru)가 있고, 중국 차(茶)에서는 다홍파오(大紅袍)를 비롯한 고급 명차 브랜드들이 있는 것처럼 커피의 세계에는 독특하고 뛰어난 품질의 스페셜티 커피들이 무수히 많다. 이처럼 음료에 등급을 매기는 것은 이들이 모두 향과 맛을 즐기는 기호식품이라는 특성 때문이다.

커피의 산지 이력을 확인하기 어려운 대량의 커머더티(또는 커머셜) 커피와 달리 스페셜티 커피는 생산지와 농장, 품종, 가공방식은 물론, 심지어 같은 농장이라 하더라도 구획을 나눠 위치에 따라 구별한다. 또 실험적으로 약간씩 가공방식의 변화를 주면서 관리하는 등 세분화된 단위로 판매된다. 그래서 스페셜티 커피의 종류는 별처럼 많고, 풍미는 색의 스펙트럼만큼 다양하다.

변화의 바람은 커피전문점보다 가정에서 먼저 일어나고 있다. 소비자들은 다양한 원두를 맛보며 스스로의 입맛에 맞는 원두를 찾는다. 생산지조차 모호한 다크 블렌드 또는 마일드 커피가 아니라, 어느 산지의 어떤 품종과 가공방식 인지를 따지며 선택한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공습은 온라인을 통한 원두 구매가 크게 늘어나는 변화를 만들고 있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커피 소비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예고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커피전문점 시장 규모가 미국, 중국에 이어 세 번째인 것이나, 편의점과 치킨에 이어 커피 프랜차이즈가 세 번째로 많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우리 커피 소비 문화의 독특한 특징으로 불 수 있다. 하지만, 커피 소비 양식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시나브로 커피는 우리 일상을 함께하는 기호식품이 되었고, 보석처럼 빛나는 뛰어난 커피들은 언제,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추세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 전 세계 커피시장에서의 큰 흐름이다.

소비의 변화는 곧 생산지의 변화를 이끈다. 전 세계 커피 농가들은 변화의 바람을 직감하며, 중남미 커피 농가들부터 앞다투어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와 도전은 대대로 이어져온 커피 농가의 가난과 눈물의 대물림을 끊는 새로운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최상기 커피프로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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