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표향 기자

등록 : 2019.10.17 04:40

“아무 부대낌 없이 출연 결정… 현실에 갇힌 모두의 이야기죠”

등록 : 2019.10.17 04:40

영화 ‘82년생 김지영’ 주연 정유미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조남주 작가의 동명 원작 소설보다 긍정적인 결말을 맺는다. 정유미는 “나와 내 주변 모두의 미래가 더 밝아질 거라는 희망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매니지먼트 숲 제공

표정을 잃은 푸석한 얼굴 위로 노을이 진다. 거실 깊숙한 곳까지 기다랗게 늘어진 그림자가 어쩐지 위태로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러나 사그라지는 햇살일지언정 노을만은 항상 곁에 있어, 그 언젠가 어머니의 쓸쓸한 시간을 위로했을 것이고, 지금은 그 딸들을 따사로이 보듬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어머니이자 딸이며 자매이자 친구였던 우리 모두를.

영화 ‘82년생 김지영’(23일 개봉)은 30대 여성 김지영이 살아온 지난날과 2019년 오늘을 스크린에 세밀화로 그려낸다. 김지영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보편적인 여성의 삶 속으로 뛰어든 배우 정유미(36)는 딸로, 아내로, 엄마로, 친구로 관객에게 다가와 가만히 마음을 두드린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딱 노을만큼의 은은한 온기를 품고서 말이다.

16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마주한 정유미는 “이 영화와 관련된 모든 일이 자연스러웠다”고 말했다. “과거엔 욕심 냈지만 투자가 되지 않거나, 주연 자리가 부담스러워 제가 먼저 피한 적도 있어요. 일부러 여러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을 고르기도 했죠. 그런데 이번엔 달랐어요. 주연의 책임이 그렇게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았고, 지금 이 시기에 제가 잘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출연을 결정할 때 어떠한 부대낌도 없었어요.”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느라 직장 복귀를 못한 김지영의 고민은 동시대 여성들의 현실을 사실 그대로 보여준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김지영의 일상에 공허가 밀려들면 관객의 가슴도 저릿해진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는 가사와 육아에 지친 지영의 일상을 비추며 시작된다. 남편 대현(공유)은 집안일에 소홀하지 않지만 지영이 짊어진 무게를 동등하게 나누진 못한다. ‘나’라는 존재를 잃은 채 아내이자 엄마로만 살아가는 삶에 짓눌리는 순간마다, 지영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그의 어머니, 외할머니, 친구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지영이가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고. 정유미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맞닥뜨렸을 때 지영의 내면에 켜켜이 쌓인 감정들이 터져 나온다”며 “갑작스럽게 돌변하면 오히려 극의 흐름을 방해할 것 같아서 감정에만 집중해 연기했다”고 말했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 간 카메라는 지영의 꿈 많던 어린 시절과 열정 넘치던 직장 생활을 들여다본다. 지극히 평범한 그 풍경 속에는, 젊은 시절 오빠들을 뒷바라지하느라 공장에서 미싱을 돌려야 했던 어머니(김미경)가 있고, 할머니의 편애를 받은 남동생(김성철)이 있으며, 남학생에게 스토킹당한 10대 딸에게 행동거지를 똑바로 하라고 꾸짖는 아버지(이얼)가 있다. 여자라서 회사의 중요한 업무에서 밀려난 씁쓸함, 여자 화장실 불법 촬영 피해를 당한 공포, 육아하는 여성을 비아냥대는 모진 말들이 남긴 상처도 고스란히 담겼다. 이 모두가 지영에겐 그리고 이 시대 여성들에겐 ‘일상’이었다.

정유미는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주저했다. “평범한 삶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내가 위로를 전한답시고 지영이를 연기하는 게 맞는 일일까, 어쩐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차별당한 경험이 없진 않겠지만, 딱 집어 말할 만큼 자세히 기억나는 일화도 없고요. 영화를 찍으면서 엄마와 할머니가 많이 떠올랐어요. 평소에 무심한 딸이었던 저를 새삼 반성하기도 했고요. 이 영화 덕분에 내 삶과 내 주변을 돌아봤어요. 경력 단절 여성과 육아하는 엄마들만의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현실에 갇히고 상처받은 모두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정유미는 시나리오를 받은 뒤 조남주 작가의 원작 소설을 뒤늦게 읽었다. 촬영하는 내내 소설책을 성경인 양 의지했다. 시나리오보다 구체적인 소설 속 묘사가 연기에 도움이 됐다. “막연하게 기도하는 마음이었어요. 소설을 읽고 촬영장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감정이 자연스럽게 올라와요. 소설을 읽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마음가짐도 달랐어요. 이 영화에 임하는 저만의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정유미는 일상의 공기를 섬세하게 담아 낸 연기로 진한 공감을 자아낸다. 매니지먼트 숲 제공

‘82년생 김지영’은 김지영이라는 한 개인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정신의학과 상담을 받고 직장 복귀를 준비하면서 지영의 얼굴엔 생기가 돈다. 그리고 남의 목소리를 빌려 속내를 꺼내놓던 지영은 비로소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정유미는 결말 즈음 지영이 혐오 표현을 아무렇게 않게 내뱉는 사람들을 향해 “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려고 애쓰느냐”고 당당히 말하던 장면을 인상 깊게 떠올렸다. 그러면서 혐오 표현 관련 단어 자체를 기사에는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혹여 무심코 기사를 읽다가 상처받을지도 모르는 이들을 위한 배려였다.

‘82년생 김지영’도 스크린으로 옮겨 오기까지 숱한 혐오의 말들을 돌파해 왔다. 이 책이 불온 소설이라도 되는 양 이유 없이 매도하고 비난하던 목소리는, 영화 출연을 결심한 정유미에게까지 번져 왔다. 악성 댓글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도배했고, 결국 고소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정유미가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댓글들을 다 읽지도 못하겠더라고요. 현실감도 없고요. 다양한 의견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해해 보고도 싶어요. 하지만 당장은 이 영화를 관객과 공유하면서 진심을 잘 전달하는 게 저의 역할이에요.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 악플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거라고 봐요. 이 영화는 그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해요.” 그늘을 툭툭 털어낸 정유미는 다시 밝은 얼굴로 돌아와 생긋 웃었다.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괜한 논쟁으로 아까운 시간을 소모하기엔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해요.”

마지막으로 또래인 지영을 실제로 만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지 물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생각이 정리되면 지영이가 더 궁금해질 것 같다”면서 정유미가 살짝 덧붙였다. “지영아, 잘 지내지? 회사 잘 다니고 있지?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고 싶어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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