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소형 기자

등록 : 2020.06.20 04:30

[과학 아는 엄마 기자] 코로나 시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등록 : 2020.06.20 04:30

게티이미지뱅크.

야근을 마치고 지하철을 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뚜렷한 경로가 밝혀지지 않은 채 확산되고 있어 불안하긴 하지만, 출퇴근할 땐 마땅한 대체 수단이 없는 처지라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이용한다. 마침 자리가 났길래 냉큼 앉아서 잠시 눈을 붙이려 하는데, 갑자기 옆자리 아주머니가 소리를 빽 질렀다. “마스크 내리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아주머니의 시선은 출입문 근처로 향해 있었다. 대학생쯤 돼 보이는 젊은이 셋이 둘러서서 마스크를 턱 쪽으로 내린 채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아주머니의 화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젊은이들은 주변 눈치를 보더니 아무 대꾸도 못한 채 이내 대화를 중단하고 마스크를 올려 썼다. 아주머니의 지적 덕에 감염 위험이 조금이라도 낮아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아주머니가 그 젊은이들과 아는 사이였어도 똑같이 대처했을까 의문이 생겼다.

쉬는 주말 동네 카페에 들러보면 삼삼오오 모여 마스크는 아예 벗어둔 채 대화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로 가득하다. 생활 속 거리두기 간격 1~2m를 지키기는커녕 다닥다닥 붙어 앉아 얼굴을 마주보며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케이크나 아이스크림도 서슴없이 나눠 먹는다. 우리 중에는 코로나19 따위에 걸릴 사람이 없다고 확신하는 듯한 모습이다. 코로나19가 아는 사람은 선택적으로 피해가고, 모르는 사람만 공격하라는 법은 결코 없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우리끼리’는 괜찮지만, ‘모르는 사람’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구성원에 대해선 쉽게 안심하고 신뢰하는 반면,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하거나 의심하거나 피하거나 심지어 혐오하기까지 하는 반응을 보인다. 아는 사람들은 감염병 예방 수칙을 잘 지키고 있을 테니 만나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낯선 사람들에 대해선 감염병을 퍼뜨릴 지 모른다고 여기며 불편해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선 생존에 좀 더 유리해지기 위해 인류가 진화시켜 온 ‘행동면역’의 영향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양이나 냄새가 이상한 물체를 보면 굳이 가까이 가지 않는다. 또 더럽고 어두운 곳에서 사는 동물은 두려워하거나 피하게 된다. 바로 이런 현상들이 행동면역이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게 심리학의 분석이다. 썩은 음식이나 더러운 동물은 나쁜 병을 퍼뜨릴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이 있다고 본능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질병에 대항할 수 있는 면역체계를 갖고 태어나는데, 과학자들은 이를 선천면역이라고 부른다. 이후 자라는 동안 다양한 병원균을 만나면서 인체에는 태어날 땐 없던 항체가 만들어진다. 이는 획득면역 또는 후천면역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선천면역과 획득면역만으로는 쉴 새 없이 나타나는 신종 병원균과 감염병의 위협으로부터 생존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류는 터득했다. 그래서 생물학적 면역 체계와 별도로 행동면역이 작용하도록 진화해왔다는 설명이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코로나19 이후 ‘대세’로 굳어진 ‘언택트’(비대면) 소비 역시 행동면역의 작용에서 비롯됐다고 보기도 한다. 친숙한 집단 소속이 아닌 불특정 다수와 마주쳐야 하는 상황을 본능적으로 피하기 위해 오프라인 매장을 찾는 대신 온라인 쇼핑몰에 더 많이 접속하게 됐다는 것이다. 진화 과정에서 인간에 내재된 행동면역 체계가 현대 사회의 소비 패턴까지 바꿔 놓았다는 해석이다.

문제는 행동면역이 무작위적인 인종차별이나 외국인 혐오를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19가 우한에서 발병했다는 이유로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을 모두 바이러스와 연관시키며 혐오 감정을 드러내는 서양인들의 언행이 외신을 통해 연이어 들려온다. 전혀 다른 집단인 아시아인에 대해 서양인들이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던 막연한 편견이나 두려움이 코로나19를 빌미 삼아 비뚤어진 형태로 표출되는 것일 수 있다. 코로나19의 2차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행동면역에 기반한 이 같은 부작용은 더욱 심해질 지 모른다는 우려가 설득력 있어 보인다.

올해 해외여행은 글렀다. 다행히 코로나19가 예상보다 빨리 종식된다 해도 당분간은 선뜻 해외로 발길이 나서지 않을 것 같다. 서구 사회에 한동안 남아 있을 인종차별을 아이가 굳이 여행지에서 경험하게 하고 싶진 않다. 코로나19로 표출된 인간의 행동면역이 오랜 시간 지구촌이 함께 다져온 세계화와 다문화 트렌드마저 무너뜨리고 있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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