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지 기자

등록 : 2019.12.13 17:48

[시시콜콜 What] 필리버스터 A to Z, 한국 최초ㆍ최장 기록은?

등록 : 2019.12.13 17:48

합법적 의사진행방해…주로 무제한 토론 방식 이뤄져

김대중 전 대통령, 동료 의원 구속 막으려 처음 나서

박정희 유신체제 후 사라졌다 국회선진화법으로 부활

테러방지법 ‘1번 타자’ 김광진…이종걸 751분 ‘최장’

국회에 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필리버스터(Filibusterㆍ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방해)’ 정국의 기류인데요.

13일 12월 임시국회 첫 본회의에 상정될 공직선거법 개정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법 등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쟁점 법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신경전입니다.

자유한국당은 이 법안들을 저지하기 위해 필리버스터를 신청하겠다고 밝혔고, 더불어민주당은 법안 통과 필요성을 호소하기 위해 필리버스터로 맞불을 놓겠다는 입장이에요. 패스트트랙 법안은커녕 이날 본회의는 ‘임시국회 회기 결정’부터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13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 패스트트랙 법안 처리를 위한 본회의 개의를 기다리며 의석이 비어 있다. 고영권 기자

◇필리버스터가 대체 뭐기에?

필리버스터 어원은 ‘해적선’, ‘약탈자’를 의미하는 스페인어에서 유래됐는데요. 국회에서 소수파가 다수파의 독주를 막거나 필요에 따라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의사진행을 고의로 방해하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주로 발언시간에 제한이 없는 점을 이용해 의원들이 돌아가며 장시간 연설을 하거나 아주 느리게 움직여 회의 차수를 넘기는 등의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필리버스터는 고대 로마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서깊은 제도인데요. 해가 질 때까지 회의를 마쳐야 한다는 규정을 이용해 하루 종일 연설하는 방법으로 법안 통과를 막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854년 미국 상원에서 노예제로 대립했던 캔자스-네브래스카 주를 신설하는 내용의 법안을 막기 위해 반대파 의원들이 장시간 토론하며 의사진행을 방해한 사건부터 정치 용어로 자리 잡았다고 하네요.

김대중 전 대통령.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리나라 최초의 필리버스터는?

때는 1964년 4월 20일, 고(故)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 의원 시절 동료인 김준연 자유민주당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안 통과를 막기 위해 국회 본회의에서 장시간 연설을 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필리버스터로 꼽힙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김 전 의원은 “정권이 한일협정 비밀회담에서 일본에게 정치자금으로 1억3,000만 달러를 받았다”고 폭로했는데요. 이에 한일협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막기 위해 본보기로 삼으려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이 고발하면서 김 전 의원이 구속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주제에서 벗어나면 제지를 당할 수 있었지만 김 전 대통령은 원고도 없이 단상에 올랐고 319분(5시간19분) 동안 막힘 없이 연설을 펼쳤다고 하는데요. 당시 이효상 국회의장의 끌어내리겠다는 압박에도 끝까지 버티면서 결국 구속동의안은 회기 내에 상정되지 못한 채 산회했습니다.

김 전 의원은 국회 회기가 끝난 후 동의안 없이 구속됐지만, 야당과 국민들이 반발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됐죠. 이후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를 선포한 후 본격화한 1973년 ‘의원의 발언 시간은 30분을 초과할 수 없으나, 의장은 15분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1회에 한해 연장할 수 있다’고 국회법을 바꾸면서 사실상 필리버스터를 금지했습니다.

2016년 2월 김광진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의 본회의 의결을 막기 위한 무제한 토론을 하고 있다. 5시간 32분 동안 연설을 한 김 전 의원 뒤로 당시 정의화(왼쪽부터) 국회의장, 이석현 국회부의장, 정갑윤 국회부의장. 연합뉴스

◇국회선진화법 이후 필리버스터 1번 타자는?

필리버스터가 사라지자 국회에는 대신 ‘빠루(노루발못뽑이)’, ‘전기톱’, ‘최루탄’ 등 연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른바 ‘동물국회’로 변모한 후 몸싸움이 격화되면서 비판 여론이 커졌죠. 이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18대 국회가 지난 2012년 5월 마지막 본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 즉 ‘국회선진화법’을 통과시키면서 필리버스터가 다시 부활했습니다.

그렇다면 선진화법 이후 첫 필리버스터는 언제였을까요? 2016년 2월 23일, 국회 본회의에 정의화 국회의장이 직권상정한 ‘테러방지법안’의 통과를 막기 위해 당시 야당 의원들이 나서면서 52년 만에 필리버스터가 이뤄졌어요. 첫 타자는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비례대표 초선이자 현역 최연소였던 김광진 의원이었습니다.

현재는 청와대 정무비서관이지만 당시 ‘뉴비(Newbie)’였던 김 전 의원은 332분(5시간32분)을 본회의장 단상에 서서 쉬지 않고 말하며 자정을 넘겨 큰 관심과 호응을 받았는데요. 이후 지금 성남시장인 은수미 당시 의원 또한 세 번째 주자로 나서 618분(10시간18분)을 토론하고 병원으로 행하는 투혼을 보였습니다.

길고 긴 시간을 어떤 내용들이 채웠을까요? 김 전 의원은 테러방지법 제정안 전문과 관련 상임위원회 및 대정부질문 자료 등을 낭독했는데요. 은 전 의원은 토론 중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지지자들이 담긴 수 백개의 댓글을 일일이 전하기도 했습니다. 테러방지법 관련 해외 연구조사보고서,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사건 자료, 국가인권위원회 의견문에 더해 프란치스코 교황 연설까지 나왔죠. 국회의장과 여당 의원은 “직접적인 관련 없는 내용”이라며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은 전 의원 다음 타자로 나선 박원석 당시 정의당 의원은 헌법 전문을 읽었고요. 애플 ‘아이폰’ 잠금해제 논란 관련 전문가 의견서와 정보기관의 문제점을 담은 책 5권을 꺼내기도 했죠. 특히 그는 직전까지 은 전 의원이 세웠던 기록을 깰 수도 있었지만 569분(9시간 29분)을 끝으로 마무리하고 단상을 내려와 주목 받았는데요. 박 전 의원은 “은 의원은 국정원 전신 안기부에서 피해를 입은 분이기에 피해자의 기록으로 남았으면 했다”고 그 이유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2016년 2월 당시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원내대표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의 본회의 의결을 막기 위한 10시간 18분의 무제한 토론을 마친 은수미 의원(현 성남시장)을 부축하며 본 회의장을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나라 최장 필리버스터 기록은?

이렇게 당시 김 전 의원을 시작으로 야당 의원 38명은 쉬지 않고 무제한 토론을 9일, 총 11,545분(192시간25분) 동안 이어갔어요. 이중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이자 마지막 주자였던 이종걸 의원이 무려 751분(12시간31분)으로 최장 필리버스터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데요.

당시 야당의원들은 테러 방지를 위한 법안은 필요하지만 본회의에 올라가있던 법안이 여러 부분에서 인권침해 요소 등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필리버스터는 토론을 하겠다는 신청자가 더 이상 없거나 제적 의원의 5분의 3(300명 중 180명)이 찬성하면 강제로 종료할 수 있는데요.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제3당의 의석수가 필요했지만 이들 역시 필리버스터에 참여하면서 손 쓸 수 없는 상황이었죠.

어떻게 끝났냐구요? 4ㆍ13 20대 총선 선거구 획정을 앞두고 선거법 개정안의 통과가 시급해지는 상황이 되면서, 결국 마지막 주자이자 의원들을 대표하는 이 의원이 필리버스터 중단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의원은 당시 “38명 의원들의 열정과 국민의 열망을 제 판단으로 날려 죽을 죄를 지었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결국 테러방지법은 통과됐죠.

다시 시작될 여야의 필리버스터 전쟁, 과연 이번엔 어떤 모습일까요?

이유지 기자 mainta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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