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현 기자

등록 : 2020.06.15 04:30

박재규 前 통일부 장관 “文정부, 인내심 필요한 때… 北에 일관된 메시지를”

등록 : 2020.06.15 04:30

[6ㆍ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인터뷰]

“北, 한반도 긴장 몰고가선 안 돼… 빠른 시일 내 대북특사 파견 고려해야”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현 경남대 총장)이 11일 서울 종로구 경남대 집무실에서 본보와 6ㆍ15남북공동선언 20주년을 기념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2018년 해빙기 이후 2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북한이 문재인 정부에 ‘결별’을 선언하고 ‘군사 행동’까지 위협하는 상황이다.

답답한 남북관계를 진척시킬 묘책은 없는 걸까. 6ㆍ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을 맞아 공동선언 주역 중 한 명인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현 경남대 총장)을 만나 해법을 물었다. 11일 서울 종로구 경남대 집무실에서 만난 박 전 장관은 “북한은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한 협력 등을 거부해 자신들의 불만을 강하게 인식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다”며 “인내심을 갖고 북한을 설득할 때”라고 조언했다. 또 “북한도 북미ㆍ미중ㆍ남북 3가지 바퀴의 역할을 잘 판단하고 남북관계를 긴장으로 몰아갈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디딤돌로 삼아나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남북관계 상황을 반영해 14일 추가 서면인터뷰도 진행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2000년 6월 14일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시내 목란관에서 열린 만찬에서 박재규(왼쪽) 통일부 장관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경남대 제공

-6·15 선언 20주년을 맞은 감회가 궁금하다.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고 평양 순안공항에 발걸음을 내디뎠던 순간의 감동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6·15 선언이 없었다면 남북은 분단 반세기 냉전적 대결 구조를 청산하는 작업을 시작할 수 없었다.”

-6ㆍ15 선언의 의의는.

“남북이 통일 방안을 가지고 명분싸움을 하기보다 통일 이전에도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해 ‘사실상의 통일’ 상황을 만들고 점진적으로 공동체적 통일을 지향하기로 한 ‘한반도판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다. ”

-당시 남북이 합의한 최대 목표는 무엇이었나.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기틀을 제도화 하자는 약속이다. 남북 정상이 원칙적 합의를 양산하기보다 하나라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남북 간 과거 합의와 달리 후속 실무회담을 21차례(남북 장관급 회담)나 이어가며 합의사항을 구체화하고 이행하려 노력했다.”

-당시 통일부 장관으로서 남북정상회담은 물론 남북 해빙 무드를 이끌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00년 9월 1일 제2차 남북장관급회담 당시 북한이 군사회담 개최에 소극적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날 밤 10시 30분 목적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평양역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8시간을 달려갔다. 다음 날 아침 자강도 모처에 도착했더니 김 위원장이 마중을 나왔더라. 김 위원장은 ‘나를 만나지 못하면 박 선생이 안 가겠다고 했다며’라고 말하며 반갑게 일행을 맞이해줬다. 그때 김 위원장을 설득해 남북국방장관회담 약속을 얻어 냈다.”

2000년 9월1일 남북 2차 장관급회담에서 군사회담 개최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박재규(오른쪽 두번째) 당시 통일부 장관의 요청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만남이 성사된 모습. 박 전 장관은 서훈(박 전 장관 오른쪽) 당시 국가정보원 국장과 함께 자강도 지역에 머물던 김 위원장과 김용순(김 위원장 오른쪽) 당 비서를 만나 남북 국방장관 회담 개최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경남대 제공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은 없나.

“20년간 남북관계 부침이 컸지만 남북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6·15 선언의 기본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고 본다. 최근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북미관계 진전이 없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추진이 멈추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6·15 선언 이후 2007년 10·4선언, 2018년 4·27 판문점선언과 9·19 평양공동선언 등이 있었다. 남북 간 합의가 이어져도 이행 속도를 내지 못한 이유는.

“근본적 원인은 북미관계다. 한반도 냉전체제의 두 축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라고 한다면 남북 간에는 여러 합의가 있었지만 북미는 진전이 없었다.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이 처음 만났으나 2019년 2월 하노이 정상회담은 결렬된 사례에서 보듯, 북미 대결관계는 아직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못했다. 한국과 미국의 정권교체에 따라 대북정책이 일관성 없이 변화의 폭이 커 성과를 내기 어려운 탓도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리더십을 어떻게 보나.

“김정은 위원장 집권 후 2015년을 제외한 4년간(2012~2016년) 연평균 1.2% 성장했다. 2016년에는 중국과 교역으로 성장률이 3.9%까지 올랐다. 그러나 대북제재가 효력을 개시한 2017년부터 경제 성장률이 크게 둔화됐다.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은 오랜 지도자 수업과 북한 내부 권력 투쟁을 거쳐 노회한 측면이 있었다. 탈냉전기 국가 위기를 직접 겪어 대남ㆍ대미 협상에서도 매우 진지하고 신중하게 임했다. 이에 반해 김정은 위원장은 젊음과 자신감, 해외유학 경험 등을 바탕으로 국제정세 변화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아버지보다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을 닮았다. 정상회담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견주는 모습을 보여주며 국가체제 운영에 있어 자신감도 확보했을 거다. 김정은 위원장이 앞으로 과감한 비핵화 조치를 취하고 적극적인 남북관계 개선 노력에 임해주길 기대한다.”

-문 대통령이 올해 신년사, 3ㆍ1절 기념사 등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과 방역협력 등을 제안했으나 북한의 반응은 없었다.

“북한은 ‘하노이 노딜’ 이후 대남관계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북한의 가장 큰 관심사는 대북제재 해소와 체제 안전 보장이다. 미국을 설득함에 있어 우리 정부 역할이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거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독자적 남북관계’ 역시 원칙적으로는 대북제재 아래에서 이행돼 근본적인 해법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거다.”

2018년 4월27일 경기 파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김여정(오른쪽) 노동당 제1부부장이 회의장에 착석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최근 북한이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앞세워 남측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남북 통신연락채널을 모두 끊고, 13일 밤엔 군사 위협도 암시했다.

“직접적인 메시지는 대북전단 살포를 중단하라는 거다. 그러나 최근 정세와 접목해 보면 북미ㆍ남북 교착 상황에서 한반도 긴장 고조를 통해 향후 북측이 주도권을 가져가려는 의도가 커 보인다. 남측이 적대행위 금지를 약속한 4·27 선언과 9·19 군사합의 등을 어겼다며 명분을 축적하고, 향후 군사도발이 이행되면 그 책임을 남측 정부에 전가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봐야 한다. 김 제1부부장이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부여 받은 권한을 군부에 위임한다고 했으니 군사 행동 실행도 우려된다.”

-탈북민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는 오랫동안 제기된 문제지만 해결이 어려운 난제다.

“사회적 가치가 다원화되고 국민들의 권리가 신장된 고도의 민주사회에서 개개인의 ‘표현의 자유’나 ‘집회결사의 자유’는 제약할 수 없는 헌법상 기본 권리다. 그러나 이런 권리도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해하면 대법원 판례에 따라 일부 제약할 수 있다. 대북전단 살포 행위가 북한을 자극해 접경지역 주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건 현재 진행중인 문제다. 차제에 여야 정치권 합의를 통해 이를 법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

-남북관계 최종 목표는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정착이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돌파구는 어떻게 찾아야 하나.

“비핵화와 냉전구조 해체를 위해 3가지 톱니바퀴(북미ㆍ미중ㆍ남북)가 굴러가야 한다. 북미는 비핵화와 대북제재 해제를 통해 정상국가로서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 미중은 협력적 갈등관계로 나아가고 더 이상 한반도 분단을 신냉전 구도의 완충지대로 활용해선 안 된다. 남북은 앞선 모든 바퀴의 가운데 주축 역할을 해야 한다. 가운데 축이 움직이지 못하면 양측 바퀴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도 3가지 바퀴의 역할을 잘 판단해 남북관계를 긴장으로 몰아갈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디딤돌로 삼아나갈 필요가 있다. ”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이 11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급속도로 냉각된 남북관계 실마리를 풀려면 "남측은 인내심을 갖고 북한을 설득하고, 북한도 남북관계를 긴장관계로 몰아갈 게 아니라 문제 해결의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왕태석 선임기자

-문재인 정부는 현 시점의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까.

“대북전단 문제 해결책을 강구하고 북한이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도록 정세관리를 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 빠른 시일 내 특사 파견도 필요하다. 단순히 남북관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코로나19, 미국 대선 과정, 미중 갈등 관계 속에 남북이 머리를 맞대어 진지하게 제반 문제를 논의할 시점이라고 북한을 설득해야 한다. 한미 간에도 불필요한 악재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보와 상황, 대응을 공유해 나가야 한다.

특히 인내심 있는 대북 설득 노력이 필요하고, 문 대통령의 메시지가 일관돼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월 미국 대선 전까지 북핵 상황을 현상유지로 가져갈 것으로 보이지만, 북미정상회담을 정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만큼 한미 간 역할 분담도 협의해 나가야 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등을 계기로 중국이 북한을 견인해 남북대화에 나서도록 권유하는 한중 협력도 필요해 보인다.”

-6ㆍ15 선언을 잇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결실을 맺으려면.

“최근 한반도 정세를 감안하면 정부가 ‘남북관계 2.0’을 준비할 시기다. 정권 향배에 영향을 받지 않고 지속 가능한 통일정책을 세울 수 있도록 ‘통일국민협약’을 추진해야 하고, 판문점선언의 국회 비준도 필요하다. 우리로서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북한이 다시 대화 테이블로 돌아올 수 있도록 설득하고, 북미대화 중재를 위해 힘을 기울일 시점이다.”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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