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수 기자

등록 : 2020.04.16 20:00

[논.담] “코로나 사태로 G2 리더십 의문 커져, 한국 중간지대 리더 될 기회”

등록 : 2020.04.16 20:00

강선주 국립외교원 교수

강선주 국립외교원 교수는 16일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코로나 사태 이후에도 ‘G2’ 구도는 유지되겠지만 자국우선주의로 치닫는 미국의 리더십은 예전과 확연히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왕태석 선임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14세기 중반부터 오랫동안 유럽을 공포에 몰아 넣었던 흑사병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줄어든 결과 봉건제를 지탱하는 토대였던 농노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영주에게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농노의 출현은 서유럽을 중심으로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밑거름이었다.

2000년대 이후 최악의 전지구적 감염병이 된 코로나19는 방역 역량이 낮았던 중세 흑사병이나 지난 세기 스페인 독감 수준의 괴멸적인 인명 피해를 낳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정치, 경제, 사회 등에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촘촘해진 국제 네트워크가 이 감염병의 결정타를 맞고 있다. 네트워크를 지탱해온 주요국의 리더십도 도마에 올랐다. “코로나19 사태가 세계질서를 영원히 바꿔 놓을 것”(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라는 지적도 들린다.

국립외교원 강선주(56) 교수를 16일 서울 서초동 국립외교원에서 만나 코로나 사태가 불러올 국제정치질서의 변화에 대해 들었다. 강 교수는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노스텍사스대 조교수를 거쳐 현재 국립외교원 경제통상개발연구부에 재직 중이다.

-코로나19의 세계적 확산이 보건뿐 아니라 경제, 기술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과거와 비교했을 때 이번 사태가 어느 정도의 지구적 파장을 낳을 것으로 보나.

“21세기 들어 유행한 감염병으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 신종 플루, 에볼라, 중동급성호흡기증후군(메르스)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감염병들은 대체로 종식까지 약 2년의 시간이 걸렸다. 코로나19는 시작된 지 4, 5개월 정도여서 지금 단계에서 피해 규모를 파악하기 이르다. 하지만 전파력이나 치사율에서 최근 경험한 어느 감염병보다 위협적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어느 때보다 피해 지역 범위가 넓고, 심각한 경제 위기가 뒤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사스 역시 중국에서 시작됐지만 당시 중국의 세계경제 비중은 5%에 불과했다. 사스가 끝난 뒤 V자 회복이 가능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중국은 세계 총생산의 16%를 차지한다. 게다가 미국 유럽 등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더 큰 규모의 감염병 피해와 경제 위기가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 현대에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적 감염병 위기다.”

-이런 전지구적 사태가 국제정치질서에도 변화를 가져 올까.

“미국의 리더십 실추를 주목해야 한다. 최근 수 년 간 국제질서 변화의 가장 큰 요인은 중국의 부상이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미국이 여전히 우위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고했다. 세계적인 위기 상황에서 미국이 리더십을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미국은 국제적 리더십은 고사하고 자국을 감염병으로부터 막아내는 데도 실패했다. 미국의 코로나 확산 현실이 국제질서 변화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

국제질서란 조금씩 축적되면서 변하는 것이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약해지던 영국의 영향력이 미국으로 넘어간 결정적 계기로 1956년 수에즈 운하 사건을 꼽는다. 당시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에 반대해 프랑스, 이스라엘과 함께 운하를 점령하려던 영국을 미국이 손떼게 만들자 독일 총리는 ‘앞으로 독일은 물론 영국도 프랑스도 미국과 견줄 강대국이 될 수 없다’고 탄식했다. 미국은 2000년대 이후 경제 영향력이 감소했고 금융위기를 겪으며 패권마저 쇠퇴했다. 트럼프 정권 들어서는 이런 리더십에 대한 의지조차 사라졌다. 이번 코로나 사태가 그 결과물이다.”

-중국의 급성장 이후 국제질서가 G2 시기를 맞았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미중 모두 리더십에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G2’는 여전히 유효한가.

“이번 사태로 G2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이 미국을 대체하는 패권으로 등장할 가능성도 당장은 없다. 그러나 G2 간 힘의 구도가 미국 우위에서 점점 미중이 비슷해지는 상황으로 변해갈 수 있을 것이다. 서구에서는 이번 사태의 진원지인 중국의 행태를 못미더워하고 세계 리더로서의 자격에도 상당한 회의를 품고 있다. 그러나 그런 부족함을 보완할 미국의 리더십 발휘도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중이 대등해질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다. 국제질서 변화는 결국 향후 미국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코로나19 대응에서는 유럽도 공조와 협력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브렉시트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EU는 코로나 이후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외교 전문가들 사이에 ‘유럽연합이 코로나에 대응하지 못하면 코로나가 유럽연합을 죽일 것’이라는 우려가 현재 유럽 상황을 대변한다. 유럽이 코로나 사태 초기에 단결하지 못했고, 심지어 이 같은 혼돈을 틈타 헝가리처럼 권위주의 체제가 강화되는 것은 유럽이 위기 상황에 얼마나 취약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고 유럽연합(EU) 탈퇴 러시가 벌어질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당면한 과제는 인명을 구하고 경제를 살리는 것이다. EU 이전으로 돌아가서는 러시아의 위협을 감당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U는 더 이상 20여년 전 유로화 출범 당시의 활기를 되찾긴 어려워 보인다.”

-국제사회에서 다자주의와 협력 분위기가 퇴색되고 있다. 코로나가 이런 추세를 더 부추기지 않을까.

“적어도 이번 사태가 끝나기 전까지는 모든 나라가 자국우선주의를 앞세울 것이다. 국제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나라가 없으니 각자도생은 불가피하다. 결국 이런 각자도생으로는 피해 수습이 잘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되겠지만 적어도 2년 정도는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것이다.

그 뒤로는 역시 미국의 역할이 가늠자다.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하면 이런 자국우선주의에 가속이 붙을 것이다.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돼 리더십 회복에 나서더라도 트럼프 이전의 미국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다. 트럼프의 역주행은 어느 정도 수습하겠지만 전략적 선택을 고민할 경우 역시 자국우선주의 기조를 포기하기 어렵다. 미국은 더 이상 오바마 정권의 국제 리더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빠른 속도의 감염병 확산, 연쇄 경제 위기를 겪으며 세계화를 자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코로나 사태는 세계화가 좋은 점도 있었지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향후 세계화에 대한 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다. 국제분업을 모두 없애자는 식은 아닐 테지만 세계화가 주는 장점을 이용하되 이런 불안 요소들을 막기 위한 조정이 필요하다. 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심으로 품었던 무역 자유화에 대한 큰 기대도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1995년 등장 때처럼 모든 통상 문제가 WTO를 통해 해결되는 시대는 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각 나라들이 경제 협력을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슷한 정서와 이익을 공유하는 나라들끼리의 경제 협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세계보건기구(WHO) 흠집내기가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는 지원 중단까지 말했다. 국제협력 과제는 갈수록 커지는데 이처럼 번져가는 국제기구에 대한 불신과 갈등은 어떻게 해소해야 하나.

“지금 세계는 코로나라는 국제 과제에 대해 개별 국가 중심으로 대응하고 있다. 1945년 이후 국제관계 여러 분야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온 국제기구들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는 것도 추세다. 미국의 리더십 추락과 중국의 부상과 무관하지 않다. 국제기구 출범 초기에는 미국이 분담금 부담을 지면서 여러 국가를 모았지만 참여 국가가 많아지면서 갈수록 협력이 어려워졌다. 어느 나라나 부담은 덜 지면서 이익은 많이 가져가려 한다. 책임과 혜택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조정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미국 중국은 물론이고 여러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보건, 환경 등 협력이 필요한 분야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국제기구가 제대로 역할을 하려면 미국과 중국이 경쟁하면서도 협력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적극 협력하는 태도를 만들어가야 한다. 두 나라가 이런 관계를 유지해갈 수 있도록 자극하고 다리를 놓는 중간지대 국가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유럽 여러 나라나 우리가 그 몫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각국이 우리의 코로나 대응을 주목하고 있다. 한국의 국제 위상이 높아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최근까지도 우리의 정체성은 약소국과 선진국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지만 이번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약소국 정서는 확실하게 벗은 듯하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국이 중간지대의 리더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앞으로는 그에 맞는 새로운 외교의 틀을 찾아가야 한다.

다만 성공적인 코로나 대응의 기초였던 우리 의료체계가 수십 년 갈고 닦은 결과였던 것처럼 그런 외교 역량을 하루 아침에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높아진 국격에 걸맞게 기후변화 분야에서 국제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려 해도 당장은 불가능하다. 경제 체질을 바꿔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적어도 또 다른 10년이 필요하고, 그 동안 정부가 바뀌어도 관련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국민적인 의지가 중요하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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