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임 기자

등록 : 2019.12.28 09:00

[카톡방담] ‘선거법 필리버스터’ 감동도 존중도 없던 ‘3,010분의 촌극’

등록 : 2019.12.28 09:00

권성동(오른쪽 아래) 자유한국당 의원이 25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유섭 의원의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 자료를 회의장 화면에 게시할 것을 요구하자 문희상(가운데) 국회의장이 답변하고 있다. 뉴스1

23일 밤 시작된 공직선거법 개정안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방해)가 성탄절인 25일 정점을 찍고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번 필리버스터는 과거 우리가 알고 있던 필리버스터와 사뭇 달랐다. ‘다수당의 일방적 법안 처리를 막기 위한 소수당의 견제장치’라는 애초 취지를 여야 정당들이 스스로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참여한 의원들의 긴장감도 부족했고, 당연히 대중의 이목도 끌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는 2016년 테러방지법 처리에 반대해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 중심으로 이뤄졌던 필리버스터와 비교해도 확연하다. 당시 참가자는 38명으로, 192시간 27분 동안 토론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쪼개기 임시국회’에 묶여 15명이 50시간 동안 발언대에 서는 데 그쳤다. 이번 선거제 필리버스터는 역사에 어떤 모습으로 기록될까. 본보 국회팀 기자들이 카톡방에 모였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꺼진 불도)=법안 찬성자까지 필리버스터에 나서는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민주당과 정의당 의원들까지 발언대에 선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빠는 딸바봉(딸바봉)=선거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을 패스트트랙에 올리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부터 민주당 원내지도부에서는 ‘맞대응 필리버스터를 준비하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하네요. 1년 내내 선거법 개정안 협상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다가 이제 와서 ‘다수당의 폭거’라고 하는 자유한국당도 우습지만, 그렇다고 야당의 발언대에 발을 걸치는 여당의 속 좁은 모습도 썩 유쾌하지 않다는 반응들이 나왔습니다. 더 웃기는 것은 선거법 개정안이 결국 민주당과 한국당에 가장 유리하게 짜였다는 사실인데요. 물밑 협상에서 서로 밥그릇 지키기에 의기투합 하고 겉으로는 ‘우리가 개혁세력’이니 ‘탄압받는 야당이니’ 하는 것을 두고도 가식적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올해는 뚜벅이=솔직히 대부분 국민들은 선거법 개정안을 놓고 민주당과 한국당이 싸우는 이유에 공감을 못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는데, 실제 도입 취지는 전혀 살리지 못할 가능성이 큰 쪽으로 협상이 흘러갔기 때문인데요. 이례적으로 법안 찬성 측인 민주당과 정의당이 필리버스터를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관심 없고 실망한 국민들에게 범여권인 ‘4+1 협의체’(민주당ㆍ바른미래당ㆍ정의당ㆍ민주평화당+가칭 대안신당)가 하려는 선거제 개정 취지를 설명해야 했으니까요.

문희상 국회의장(왼쪽)과 주승용 국회 부의장이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의원이 '공직선거법 개정안'에 대해 무제한 토론하는 동안 의장석을 교대하고 있다. 연합뉴스

꺼진 불도=범여권의 ‘맞필리버스터’에 대한 한국당 반응은 어땠나요.

광화문 찍고 여의도(찍고)=한국당으로선 뒤통수를 한 방 맞은 셈이었죠. 김재원 정책위의장은 "장례식장 와서 춤추는 느낌"이라고까지 했어요. 법안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제도가 필리버스터인데, 법안 찬성 측까지 참여하는 것은 취지를 왜곡해도 한참 왜곡한다는 게 한국당 측의 반응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민주당 소속이었던 문희상 국회의장의 조력으로 ‘맞필리버스터’가 가능했다고 억울해한 한국당은 "우리가 꼭 다음에는 1당이 돼서 국회의장을 배출해 내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네요.

소통관 열렸는데 국회는 언제 소통(소통관)=한국당에선 ‘맞필리버스터’가 거론됐을 때부터 줄곧 '법안을 낸 당사자들이 법안에 반대하는 반대 토론을 한다'고 꼬집었습니다. 심재철 한국당 원내대표는 '꼴불견 민주당'이라면서 속내를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 노골적으로 반대했지만, 속수무책으로 이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죠.

선거법 개정안 국회 필리버스터 일지. 그래픽=김대훈 기자

꺼진 불도=일부 토론자가 발언 도중 화장실을 갔다 온 것도 화제였는데요. 화장실을 다녀오면 토론이 종료된 걸로 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영등포청정수(청정수)=과거 필리버스터 때를 복기해 보면 일반적으로 발언석을 떠나면 토론이 종료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때문에 의원들은 필리버스터 전에 물을 적게 마시고, 심지어 기저귀까지 차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물론 이번에도 이런 ‘결기’를 품고 오는 의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을 계기로 필리버스터 도중 화장실을 다녀올 수 있다는 암묵적 규칙이 생긴 것 같습니다. 김종민 민주당 의원이 발언 도중 같은 당 안민석 의원이 2016년 필리버스터 당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례를 언급하며 문 의장에게 ‘허락’을 받아내면서 시작됐는데요. 이후 권성동 한국당 의원도 화장실에 다녀왔어요. 사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의원 시절인 1964년 필리버스터에 나섰다가 화장실을 다녀왔었다고 하네요.

정릉 막걸리=실제 미국에선 회의장을 비우면 즉각 토론이 끝나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합니다. 미 의회에서 가장 긴 필리버스터 기록(24시간 18분ㆍ1957년)을 갖고 있는 스트롱 서먼드 전 상원의원은 연설 도중 화장실에 가지 않으려고 연설 당일 증기목욕을 하고, 회의장에선 물도 마시지 않고, 입가에 물만 묻혔을 정도였죠.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2010년 오바마 행정부의 ‘부자감세’ 안에 반대해 8시간 35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하면서, 화장실은커녕 단 1초도 의자에 앉지 않았던 일화로 유명하죠. 반면 우리나라 국회법에는 필리버스터 도중 발생한 구체적 사안에 대해선 명확한 규정이 없습니다. 국회의장의 재량인 셈이죠.

24일 국회에서 10시간 18분 헌정사상 최장시간 기록으로 무제한 토론을 마친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이 유기홍 의원과 포옹하며 눈물 흘리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6-02-24

꺼진 불도=3년 10개월 전 필리버스터 때는 여야가 토론 주자를 격려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욕설과 상호 비방이 주를 이뤘다면서요. 과거 필리버스터와 어떻게 달랐나요.

청정수=특히 발언대 위에 자리한 문희상 국회의장을 향한 가시 돋친 발언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어요. “국민 중에 문희상씨를 국회의장으로 생각하는 분이 과연 몇 명 있을까 의문이다. 저 같으면 쪽팔려서 자진해서 내려오겠다.”(권성동 한국당 의원), “시정잡배와 다를 게 무엇인가”(전희경 한국당 의원)라는 발언이 잇따라 터져 나오자, 문 의장도 참지 못해 ‘버럭’했었죠. 2016년 필리버스터 때 당시 새누리당 소속이었던 정갑윤 국회부의장이 사회를 보다 공천 배제 소식이 알려진 후에도 필리버스터 발언자로 나온 강기정 민주당 의원에게 “나와줘서 고맙다. 사랑한다”고 격려한 장면이 화제가 된 적이 있어요. 그 때와 비교하면 삭막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찍고= 뜬금없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두고 대거리를 하는 모습도 볼썽사나웠어요. 먼저 박 전 대통령을 소환한 건 정유섭 한국당 의원이었습니다. 정 의원은 발언 도중 갑자기 “이 쯤에서 박 전 대통령의 형 집행정지를 해달라”며 “1,000일이 된 여자 대통령, 뭐 그렇게 증오로 복수를 해야 되겠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정 의원에 이어 발언에 나선 강병원 민주당 의원이 “탄핵을 유일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집단이 한국당 아닌가”라고 응수하면서 선거법 개정안 필리버스터에 느닷없이 박 전 대통령이 호출돼 주변을 어리둥절하게 했습니다.

딸바봉= 테러방지법을 두고 벌어진 이전 필리버스터는 양당이 추구하는 ‘이념’과 ‘정책’이 충돌하는 문제였죠. 안보를 중시하는 보수, 인권도 챙겨야 한다는 진보의 노선 대결이었습니다. 국민들도 두 편으로 갈라져 지지 진영의 의원들을 응원했고, 자연히 그런 분위기가 국회까지 전달된 면이 있습니다. 이에 반해 선거법 개정안은 의원들의‘밥그릇 싸움’이다 보니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다툼의 양상도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던 것 같아요.

꺼진 불도=그래도 이번 필리버스터에서 인상 깊은 장면을 뽑는다면요.

여의도고영희=“메리 크리스마스.” 25일 오후 유민봉 한국당 의원이 45분 동안의 필리버스터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한마디 던졌습니다. 평소 점잖기로 유명한 유 의원의 예상치 못한 한 마디에 장내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서로 날을 세우며 치고받는 와중에 유 의원의 한마디가 살벌한 본회의장에 잠시나마 훈풍을 불러왔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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