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 기자

등록 : 2020.02.21 14:41

[법조캐슬, 사실은?] 검사들 내부전산망 통해 ‘고별사’… 말없이 떠나는 판사와 대조적

등록 : 2020.02.21 14:41

<13> ‘조직’에 흔적 남기고 떠나는 검사들

※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간간이 조명될 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법조계. 철저히 베일에 싸인 그들만의 세상에는 속설과 관행도 무성합니다. ‘법조캐슬’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국일보>가 격주 월요일마다 그 이면을 뒤집어 보여 드립니다.

봉욱 전 대검찰청 차장검사가 지난 6월 2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청사에서 퇴임식을 가진 뒤 후배들의 박수를 받으며 떠나고 있다. 봉 차장검사의 ‘인터넷 고별사’에는 역대 최대치인 616개의 댓글이 달렸다. 이한호 기자

검찰은 ‘이프로스(e-PROS)’, 법원은 ‘코트넷(scourtnet)’, 경찰은 ‘폴넷(pol-net)’. 사법ㆍ수사기관에는 이처럼 소속 구성원만 접근할 수 있는 내부전산망이 있다. 폐쇄적 통신망인데도 익숙한 명칭들이다. 일선 검사나 판사, 경찰들이 게시판에 올린 글이 외부로 흘러나와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게 예삿일이 됐기 때문이다. 조직 내부의 정치ㆍ정책적 이슈나 휘발성 강한 항명성 글까지 그 범주도 넓다.

이 가운데 가장 특이한 채널은 이프로스. 검사들이 조직을 떠날 때 이프로스 게시판에 사의를 밝히는 전통이 굳어지면서 이프로스는 ‘사퇴의 변’을 올리는 공식 창구가 됐다. 대검찰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퇴직 검사 73명 중 ‘사직’ 키워드로 게시판에 글을 남긴 검사는 46명, 대략 63%에 달한다. 하지만 ‘감사’, ‘작별’, ‘인사’ 등 다양한 키워드로 고별사가 올라오는 것을 감안하면 열에 여덟 아홉은 이프로스에 사퇴의 변을 남긴다는 추정이 나온다. 그렇다면 검사들은 왜 내부망에 흔적을 남기고 떠나는 것일까.

◇ 한 맺힌 항명부터 석별의 정까지

최근 가장 화제가 된 고별사는 이른바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을 수사했던 주진우(44ㆍ사법연수원 31기) 전 서울동부지검 부장검사가 남긴 글이다. 주 전 부장은 대구지검 안동지청으로 사실상 좌천성 발령을 받은 뒷날인 지난달 1일 “공직관이 흔들리고 있다”며 항명성 사직 의사를 밝혔다. 그는 “정도를 걷고 원칙에 충실하면 결국 저의 진정성을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 능력과 실적, 조직 내 신망에 따라 인사가 이루어진다는 신뢰, 검사로서의 명예와 자긍심이 엷어졌다는 느낌”이라며 문재인 정부의 인사원칙에도 불만을 드러냈다.

살아있는 권력을 겨냥한 환경부 블랙리스트 수사는 여러 모로 많은 뒷말을 남겼다. 환경부 산하기관 임원들에 대해 사퇴 동향을 파악하고 사퇴를 압박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과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은 결국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에 넘겨졌다.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청사 모습. 한국일보 자료 사진

일선 검사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는 고별사 역시 상부에 대한 항명이다. 김윤상(50ㆍ24기) 전 대검찰청 감찰1과장은 2013년 9월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채동욱 검찰총장 관련한 의혹을 감찰하겠다는 방침에 맞서 ‘내가 사직하려는 이유’의 글을 올려 화제를 뿌렸다. 김 전 과장은 “직을 걸 용기는 없었던 못난 장관과 그나마 마음 착했던 그를 악마의 길로 유인한 모사꾼들에게, 총장의 엄호하에 내부의 적을 단호히 척결해 온 선혈낭자한 내 행적노트를 넘겨주고 자리를 애원할 수는 없다”면서 “차라리 전설 속의 영웅 채동욱의 호위무사였다는 사실을 긍지로 삼고 살아가는 게 낫다”고 적었다.

일반적으로는 함께 일한 직원과 선후배들에게 간략하게 감사 인사를 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급작스럽게 사직하면서 교훈적 글을 남기는 경우도 없지 않다. ‘재계의 저승사자’로 불렸던 남기춘(59ㆍ15기) 전 서울서부지검 검사장은 2011년 한화그룹과 태광그룹 비자금 수사를 지휘하던 도중 돌연 사의를 표명했으나 담담한 글을 남겼다. 남 전 검사장은 “훌륭한 선후배, 동료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던 덕분에 정의감, 바른 자세, 억울한 사람 만들면 안된다는 교훈 등 귀중한 가치를 배웠다”고 회고했다. 그는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믿는다’는 법정스님의 저서 ‘아름다운 마무리’의 한 구절도 인용했다.

◇ 인기 지표가 된 직원들의 ‘댓글 부조’

검사들의 인터넷 고별사는 끈끈한 조직문화의 상징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지만 효율적으로 인사를 나누는 방편이라는 평가도 없지 않다. 1년 단위로 전국 검찰청을 옮겨 다니는 간부들이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동료 직원들에게 일시에 사직을 고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 한 부장급 검사는 “일반 회사 같으면 하루 송무식을 하면 끝이지만 부장 이상급 검사라면 수백명의 직원들에게 일일이 연락을 해야 한다. 인터넷 고별사는 이런 번거로움을 해결해 주는 방식”이라고 귀띔했다.

근속연수가 긴 검사장급 검사들이 조직을 떠날 때는 직원들의 ‘댓글 부조’도 쏟아진다. 지난 6월 26년간 몸 담은 검찰을 떠난 봉욱(54ㆍ19기) 전 대검찰청 차장검사는 이프로스에 편지지 4장 분량의 자필 글을 올렸다. 봉 차장검사는 “힘들고 숨 가쁜 상황에서도 같이 밤을 새워 고민하고 열정을 쏟아 의기투합했던 선배, 동료, 후배 검사님들과 수사관님들, 실무관님들께 고개 숙여 참으로 고마웠다는 말씀 드린다”고 썼다. 봉 차장검사의 글에는 무려 616개의 댓글이 달렸다. 김경수(59ㆍ17기) 전 대구고검장의 고별사에 달린 역대 최다 댓글(613개)을 넘어선 기록이다.

댓글 개수가 검찰 생활의 성적표 내지는 인기의 지표로 인식되기도 한다. 수도권에서 근무하는 한 부장검사는 “직원들에게 댓글을 달라고 주문하는 선배들도 간혹 있다”면서 “퇴직 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할 때 댓글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는 경우도 흔하다”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고별사를 변호사 개업 광고로 활용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최근 서초동에 사무실을 연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이프로스에 올린 고별사가 사실상 외부로 공개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변호사 개업 광고를 위해 의도적으로 썼다는 의심이 드는 글도 보인다”고 전했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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