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범 기자

등록 : 2020.02.27 18:04

“순정만화는 당대 여성들의 욕망을 투영한 만화”

등록 : 2020.02.27 18:04

1996년 윙크의 신인만화공모전을 통해 혜성처럼 등장한 천계영 작가는 '오디션'(그림) '언플러그드 보이' 등을 연달아 흥행시키며 당시 대중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후 웹툰 시대에도 '드레스 코드' '좋아하면 울리는' 등을 성공시키며 23년째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다.

천계영의 ‘오디션’을 보며 내 안에도 잠재된 예술혼을 찾아보는 데 골몰했다. 박은아의 ‘다정다감’ 속 고등학생 주인공들과 함께 막막한 학창시절을 견뎠다. 박소희의 ‘궁’을 보며 패션 감각을 길렀고, 한승원의 ‘프린세스’를 보며 사랑을 공부했다. 1980~2000년대 청소년기를 보낸 여성에게 순정만화란, 기댈 수 있는 일종의 ‘큰언니’였다.

한국 순정만화의 시조로는 1980년대 김혜린과 신일숙, 두 작가가 꼽힌다. 김혜린의 ‘북해의 별’(1983), 그리고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1986)은 방대한 서사 위에다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얹은, 새로운 만화였다. ‘명랑만화’라 불리던 기존 만화와 다른, 순정만화의 탄생이었다. 1990년대, 2000년대는 순정만화 전성기였다. 황미나, 김진, 강경옥, 이빈, 원수연, 박희정, 천계영 등 개성 강한 작가가 연이어 등장, 남다른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밍크’ ‘댕기’ ‘이슈’ 등은 여중고생 교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순정만화 잡지였다.

'아무튼, 순정만화'를 쓴 이마루(오른쪽) 작가와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콘텐츠스쿨 홍난지 교수를 지난 20일 홍대의 만화전문서점 북새통에서 만났다. 왕태석 선임기자

그러다 출판만화 시대가 웹툰 시대로 넘어가던 2000년 전후한 시기, ‘순정만화’는 갑자기 사라졌다. 그런데 진짜 사라졌을까. 순정만화 덕후를 자처하며 ‘아무튼 순정만화’란 책을 쓴 이마루 작가, 만화가를 꿈꿨으나 만화시장이 급변하면서 연구자로 방향을 튼 홍난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가 최근 서울 서교동 만화전문서점 북새통에서 마주했다. 이들에게 순정만화는 추억을 넘어 현재진행형인 여성의 서사다.

-어릴 적 순정만화는 어떤 의미였나.

이마루(이하 이)= “개인적으로는 천안에 살던 내가 가보지 못한 대도시의 풍경을 보여주거나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세계를 넓혀주는 통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10대 여성 청소년들을 위해 그만큼의 인력과 재능이 투입된 문화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홍난지(이하 홍)= “1986년 황미나 작가를 중심으로 신일숙, 김혜린, 김진 등 9명의 작가들이 ‘나인’이란 동호회를 결성하고 동인지 형식의 만화를 펴냈는데 1,000부를 인쇄한 1호가 모두 팔렸다. 3호도 3,000부를 인쇄했을 정도로 반응이 엄청났다. 이를 계기로 1988년에 순정만화잡지 ‘르네상스’가 창간됐고 1988년부터 1993년까지 무려 13종의 순정만화 잡지가 창간됐다. 신데렐라 스토리나 신파적 연출에 공감할 수 없던 여성 독자들에게, 주체적인 여성을 그린 순정만화는 엄청난 만족감을 줬다.”

1989년 11월 창간돼 1994년 7월 폐간한 대한민국 최초의 순정만화 잡지 '르네상스'는 한국 순정만화 전성기를 이끌었다

-순정만화라면 잡지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 “그때는 잡지 시장 자체가 활발했다. 씨네21, 쎄씨 같은 잡지들도 모두 그때 생겼다. 잡지사 입장에서, 잡지 시스템은 작가에게서 일정 분량 원고를 뽑아낼 수 있고 고정 독자도 확보할 수 있게 해줬다. 단행본 출간에 앞서 인기를 가늠할 수도 있다. 물론 2,3회 연재하다 끝나는 만화도 있어 당시 어린 독자였던 입장에서는 무척 실망했던 기억도 난다.”

홍= “잡지는 철저하게 인기 있는 작가들에게만 더 많은 지면을 준다. 계속 연재하려면 더 나은 작품을 그려야 했다. 이건 만화의 질적 성장에 기여한 측면이다. 또 잡지는 기본적으로 ‘교양서’의 영역에 걸쳐있다. 만화방에서 숨어서나 볼 수 있었던 만화를 음지에서 양지로 끄집어 냈다는 점에서도 고무적이다.”

-순정만화는 만화대여점으로 결국 죽었다.

이= “대여점은 결국 만화를 ‘사서 보는 컨텐츠’라는 인식과 멀어지게 만들었다. 실제로 작가들이 수익을 내는 데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여기에다 2000년대 초중반을 넘어가며 스캔해서 돌려보는 ‘스캔만화’까지 나오면서 시장은 악화일로에 아비규환이 됐다.”

홍= “이걸 단지 대여점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는 게, 오늘날 웹툰도 ‘대여’ 개념이 있다. 이때 유료 대여 수익의 일부가 작가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당시 대여점은 그게 불가능했다. 독자 입장에선 적게나마 돈을 내고 빌려본 거고, 대여점 주인도 돈을 주고 책을 매입한 거니 각자 입장이 있다. 결국 저작권 개념이 희박했던 시대에, 시스템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런 시장이 열려서 모두가 고통 받게 된 거다.”

-페미니즘, SF, 퀴어 같은 소재가 순정만화엔 오래 전부터 있었다.

미혼모와 흑인 혼혈 등 다양한 소수자 정체성의 인물을 매회 등장시킨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 성적 지향이 모호한 인물을 그린 유시진의 '쿨핫', 90년대초 대학사회를 배경으로 페미니즘 문제의식을 골몰한 이진경의 '사춘기', 남자 청소년들의 방황과 동성애 관계를 그려낸 원수연의 'Let 다이' 등, 한국 순정만화는 페미니즘, 퀴어 등 급진적 주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매체였다.

이= “순정만화 작가들 자체가 주류가 아니었기 때문에 비주류의 이야기에 마음이 끌리지 않았을까. 창작자들의 연령이 다른 장르에 비해 젊었다는 것도 주요한 이유였을 것 같다.”

홍= “만화는 다른 문화 콘텐츠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저렴하다. 투자와 수익을 따지는 자본 논리가 침투할 여지가 적으니 창작 작업을 하는데 작가의 자율성이 더 잘 보장됐다. 여기에다 시장 자체가 순정, 소년, 성인 등으로 세분화되다 보니 타깃층 영향이 더 잘 반영됐다.”

순정만화 잡지를 보고 자란 이마루 작가는 현재 패션지 ‘엘르’에서 근무 중이다. 왕태석 선임기자

-그럼에도 순정만화는 ‘소녀 취향’으로 저평가 됐다.

이= “얼마 전 신일숙 작가가 한국만화가협회장이 됐는데, 첫 여성 협회장이라 하더라. 윤태호 작가 같은 후발주자도 이미 거쳐간 자리다. 매년 열리는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한국 만화 회고전’이 열렸을 때도 순정만화는 ‘껴준다’는 느낌이었다. 작품 퀄리티를 떠나서, 여성이 즐겼다는 이유로 저평가된 부분이 분명히 있다.”

홍= “예술적인 감흥과 진취적인 캐릭터는 어떤 만화 못지 않지만, 여성 작가가 그렸다는 이유로 폄하된 건 사실이다. 사실 만화뿐 아니라 여성 문화 자체가 오랫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이미 1980년대에 이런 놀라운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없어서 답답하다.”

-그런데 순정만화 작가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이= “소비층의 관심사가 달라졌다. 지금의 10대들은 만화 주인공이 아닌 실존하는 아이돌을 소비한다.”

홍= “출판만화의 몰락과 웹툰 체제의 안정기 사이 7,8년 정도의 공백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청소년 세대의 감성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여기에다 여성 작가들이 결혼하면서 경력단절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콘텐츠스쿨 홍난지 교수. 왕태석 선임기자

-순정만화의 정의는 뭔가.

이= “간단하다. 여성 창작자가 만든 여자들의 이야기.”

홍= “당대 여성의 욕망을 투사시킨 만화. 이때의 욕망은 여성 작가의 것일 수도, 여성 독자의 것일 수도 있다. 구체적 욕망이 보편적 감성을 건드릴 때 시대의 흐름을 만들고 당대의 여성서사가 된다. 이렇게 정의한다면 웹툰 시대에도 순정만화는 살아있다. 감성적이다, 로맨스에 치우쳤다는 정의에서만 자유로워지면 된다. 로맨스 없이 홀로 사는 여성의 웃픈 에피소드를 다룬 김정연 작가의 ‘혼자를 기르는 법’ 같은 만화도 얼마든지 순정만화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순정만화는 ‘단절’이 아닌 ‘흐름’이라 할 수 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일보 페이스북

한국일보 트위터

한국일보닷컴 전체기사 RSS

RSS

한국일보닷컴 모바일 앱 다운받기

앱스토어구글스토어

한국일보닷컴 서비스 전체보기

Go

뉴스 NOW

이전

  • 종합
  • 정치
  • 사회
  • 경제
  • 국제
  • 문화
  • 연예
  • 라이프
  • 스포츠

다음

커지는 '저유소' 화재 미스터리… “외국인 노동자에 모든 책임 부적절”
종신제 도입하면 국민 10명 중 7명 “사형 폐지 찬성”
일본, 방사능 오염수 본격 배출 태세…“정부 대응 필요”
“직장인에게 업무방식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비효율, 삽질, 노비”
‘음주운전 초범도 처벌 강화’ 지시한 문 대통령
김소연 대전시의원 “불법 선거비용 요구 폭로 뒤 외압 있었다”
태풍 직격탄 영덕, 더디기만 한 복구… 애타는 민심

오늘의 사진

많이 본 뉴스

  • 1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