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우 기자

등록 : 2018.10.10 11:57
수정 : 2018.10.10 20:21

권력투쟁 밀렸나, 차기대권 엿보나… 헤일리 돌연 사의에 설 무성

등록 : 2018.10.10 11:57
수정 : 2018.10.10 20:21

9일 연말 사임 의사를 공개한 니키 헤일리(왼쪽) 유엔주재 미국대사가 기자들에게 말하는 모습을 그를 백악관에 초청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바라보고 있다. 워싱턴=EPA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집권 초기 유엔에서 그의 일방주의 외교 노선을 관철하며 사실상 외교안보라인의 핵심 실세로 활동한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대사가 9일(현지시간) 돌연 사임 의사를 밝혔다. 헤일리 대사는 “개인적 이유는 없다. 사람은 물러날 때가 언제인지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을 뿐 명확한 사임 이유를 밝히지 않아, 미국 언론에서 온갖 추측이 나돌고 있다.

◇폼페이오ㆍ볼턴에 밀렸다?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설은 헤일리 대사가 트럼프 정부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사실상 밀려났다는 설이다. CNN방송은 백악관 움직임에 정통한 제보 두 건을 인용해 헤일리 대사가 최근 몇 달간 트럼프 대통령과 독대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힘이 강해지면서 헤일리 대사의 백악관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헤일리 대사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그를 가장 강하게 비판한 ‘공화당 주류파’ 인사 중 하나였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유엔대사로 임명되고 나서는 외려 트럼프 대통령과 가장 끈끈한 관계를 만들었다. 렉스 틸러슨 당시 국무장관이 이끄는 국무부는 업무 추진력을 잃은 상태였고, 허버트 맥매스터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러시아의 2016년 대선 개입을 인정하는 등 소신 발언을 이어가 트럼프 대통령의 눈 밖에 났다.

반면 헤일리 대사는 폼페이오 당시 중앙정보국(CIA) 국장과 함께 상대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주의 외교에 공명하는 충성파 인사로 분류됐다. 트럼프 대통령과 틸러슨 장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헤일리 대사가 차기 국무장관으로 유력하다는 보도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올해 초 폼페이오 국장이 국무장관으로 옮기고, 역시 충성파에 가까운 볼턴이 국가안보보좌관 자리에 앉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당초 매파에 가까웠던 헤일리가 유엔 대사로서 좀 더 중도적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헤일리 대사가 외교안보팀 중심에서 밀려났다는 징후는 이미 지난 4월에 포착됐다. 당시 헤일리 대사는 CBS방송 인터뷰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시리아 정부를 계속 지원하는 러시아에 대한 신규 제재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하루 만에 백악관이 “추가 제재는 불필요하다고 결론 냈다”며 이를 뒤집었다. 한 백악관 관계자는 “헤일리 대사가 잠시 혼란에 빠졌던 모양”이라고 말했고, 헤일리 대사가 “난 혼란스럽지 않다”라고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이 사건에 대해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가 전한 실상은, 백악관 내부에서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를 하기로 결정했다가 나중에 뒤집혔지만 헤일리 대사가 미처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후 헤일리 대사의 발언이 언론에 의해 조명되는 모습은 크게 줄었다.

결국 임기 초 외교안보팀이 혼란에 빠졌을 때는 유엔대사로서 헤일리 대사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외교안보팀의 진용이 충성파로 완비돼 안정을 찾은 이후로는 유엔대사로서 활동의 폭이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업무를 그만두게 된 셈이다. 백악관 관계자에 따르면 헤일리 대사는 이미 지난 3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사임 의사를 전달했지만, 폼페이오 장관과 볼턴 보좌관은 9일 언론 보도와 공식 발표가 나올 때까지 이를 몰랐다.

◇차기 대권 노린 능동적 포석?

헤일리 대사는 트럼프 정부에서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퇴장’을 한 케이스에 속한다. 그간 백악관이나 내각을 떠난 인사들은 대부분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책상 이견이 표출되거나 스캔들 등에 연루돼 갑작스럽게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반면 헤일리 대사의 사임 의사가 알려진 9일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헤일리 대사를 백악관으로 불러들여 “언젠가 행정부로 돌아오기 바란다” “후임은 직접 정해라” 등 덕담을 쏟아냈다.

이를 두고 차기 대권 욕심이 있는 헤일리 대사가 지능적으로 사퇴를 택했다는 분석도 있다. 트럼프 정부에서 대략 2년 일하면서 트럼프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완전히 ‘트럼프파 인사’로 남아서는 대권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장 헤일리 대사가 “2020년에는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며 부정했지만 이것이 2024년 대선 출마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CNN방송의 정치 전문 에디터 크리스 실리자는 헤일리 대사가 대권 욕심이 있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과 2020년에 맞설 일은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도가 낮게 평가되고는 있지만 공화당 지지자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절대적이다. 공화당 내 경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로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대선에서 재선하거나 최소한 대권 재도전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공화당 주류 내에서는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에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나오는 게 사실이다. 당장 지난달 뉴욕타임스에 기고된 ‘트럼프 정부 내 레지스탕스(저항군)’를 자처한 칼럼이 그 징후다. 이런 구도에서 헤일리 대사가 2024년 대권을 노릴 경우, 트럼프 현직(또는 전직) 대통령과도 우호적이지만, 이미 대략 6년간 트럼프 정부를 떠나 있어 ‘트럼프색(色)’이 빠진 인사가 되기 때문에 공화당으로서는 매력적인 후보가 되는 셈이다.

헤일리 대사는 비교적 트럼프 대통령과 코드가 잘 맞았지만 ‘소신 발언’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헤일리 대사는 샬러츠빌 백인우월주의 시위와 폭력 사태가 발생한 지난해 8월 자신의 직원들에게 발송한 메일에서 “증오를 내뱉으며 행진하는 이들은 소수이지만 시끄럽다. 우리는 언제나 그들을 비판해야 한다”라고 적었다.

또 성폭력 피해 폭로 ‘미투(#Metoo)’ 운동이 반향을 일으킨 지난해 12월에는 “성폭력 피해를 입었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끼는 이들은 목소리를 낼 권리가 있다”고 발언해 이를 지지했다. 이를 염두에 둔 듯,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헤일리 대사가 사임 의사를 밝힌 지난 3일이 트럼프 대통령이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을 옹호하면서 성폭력 피해 폭로자 크리스틴 블레이시 포드 팰로앨토대 교수를 비하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두 사건 사이 영향이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

2017년 11월 헤일리 대사를 집중 분석한 잡지 뉴욕매거진은 “헤일리는 유엔대사로서 트럼프와 정면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성차별 문제나 극우주의ㆍ인도주의 관련 의제에는 트럼프와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감시망에서 멀리 떨어진 뉴욕에서 조심스레 자신의 야망을 키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다소 이른’ 사임과 연결해 보자면, 트럼프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능력을 증명한 헤일리 대사가 이제는 대권 후보로서 자신만의 색을 마련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광야로 향한 것일 수도 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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