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주 기자

등록 : 2020.06.04 20:02

백인은 특별하지 않다, 그냥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등록 : 2020.06.04 20:02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흑인 남성이 숨진 사건 이후 미국 전역에서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화하고 있는 가운데 28일 한 흑인 여성이 백인 경찰에게 큰 소리로 항의하고 있다. 미니애폴리스=AP 연합뉴스

#1. 수갑이 등 뒤로 채워진 상태로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흑인 남성 용의자의 목을 백인 경찰이 무릎으로 짓누르고 있다. 고통을 호소하던 흑인 남성이 “숨을 쉴 수 없다. 살려 달라”고 간절히 애원하고, 보다 못한 시민들이 “그도 인간”이라며 말려 봤지만, 백인 경찰의 목 누르기는 계속됐고 흑인 남성은 끝내 숨졌다.

#2 공원에서 강아지 목줄을 채워 달라는 요구를 한 흑인 남성에게 백인 여성은 대뜸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공중도덕을 위반한 건 백인 여성인데, 그는 경찰에 전화해 자신이 위협받고 있다고 도움을 요청한다. “여기 흑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빨리 경찰을 보내 주세요.”

최근 미국 전역을 뒤흔들고 있는 인종차별 반대 시위의 도화선이 된 두 장면이다. 백인은 흑인을 인간으로 상대하지 않았다. 백인에게 흑인은 그저 ‘흑인’이었을 뿐. 두 사건이 극히 예외적인 것도 아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 발생한 증오범죄 7,120건 중 흑인 대상이 46.9%로 가장 많았다.

링컨 대통령이 1863년 노예 해방 선언을 하고, 1964년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연방민권법(Civil Rights Act)이 제정된 지 56년이 흘렀지만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백인 경찰관이 흑인 청년 조지 플로이드의 목덜미를 무릎으로 찍어 누르고 있는 사진이 공개되면서 미국 전역에 인종 차별 반대 시위가 불 붙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경찰 4명은 즉각 파면됐다. 미니애폴리스=AFP 연합뉴스

끝없이 반복되는 비극과 깨달음에도 인종차별은 왜 사라지지 않는가. 세인트앤드루스대학 영화학과 명예교수인 리처드 다이어의 ‘화이트’는 그 답을 ‘백인성’에서 찾는다. 백인성은 모든 서구 문화의 기저에 깔려 특권적 위치를 형성해 온 문화적 구성물을 일컫는다. 책은 1997년 처음 출간 이후 2017년에 20주년 기념판이 나왔는데 국내 소개는 다소 늦었다.

‘화이트’가 나오기 전까지 백인 이미지를 들여다본 인종 연구는 없었다. 백인은 그 자체로 표준이자 이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였으므로 굳이 설명할 필요를 못 느꼈던 탓이다.

“인종이 오로지 유색인에게만 적용되는 한, 백인은 인종적으로 보이지도 명명되지도 않는 한, 그들/우리는 인간 규범으로 기능한다. 다른 사람들은 인종이고, 우리는 그냥 인간이다.”

다이어는 이 같은 백인성의 비가시성을 정면으로 돌파해 나가며 ‘하나의 인종으로서의’ 백인을 설명하려 든다. 권력으로서의 백인성은 보이지 않음으로써 유지돼 왔다는 걸 깨트리기 위해서다. 그는 첫머리에서 이 책의 목적을 “백인 권력의 위치를 들여다봄으로써 그것을 약화시키려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서구 문화에서 백인, 백인성은 그 자체로 특권이자 규범이었다. 남녀를 막론하고 하얀 피부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알리바이로 작동했다.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의 ‘흰색의 심포니 3번’(1865~1867), 조슈아 레이놀즈의 ‘어느 여인의 초상화’(1767~1769). 컬처룩 제공

책은 고전문학부터 대중음악, 사진, 할리우드 영화까지 종횡무진하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던, 혹은 알고서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백인성의 실체를 드러낸다. 20세기 사진술에서 쓰이는 빛은 백인 얼굴을 기준으로 발전했고, 할리우드 영화 조명 기술과 카메라 워크조차 역시 백인 주인공을 가정하고, 그들의 하얀 피부를 더 하얗고 아름답게 비추기 위해 표준화됐다. 조명은 그 자체로 위계질서를 갖는다. 누가 중요하고 아닌지를 지시한다.

이로써 백인의 얼굴은 특권화되고 ‘비백인(non-white)’은 있는 모습 그대로 재현하는 것조차 더 어렵게 만든다.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배우 스티븐 연이 자신이 주인공인 작품에서도 잘생겨 보이지 않는다고 푸념한 건 애당초 할리우드 촬영 시스템이 백인용이기 때문이다.

작가 미상. ‘심장에서 피 흘리는 그리스도’ 1996년 제노아 성당에서 판매하던 엽서다. 백인으로 재현된 그리스도를 통해 백인 헤게모니는 더욱 강화된다. 컬처룩 제공

백인성이란 권력은 이미지를 넘어 담론으로도 발전해 간다. 저자는 백인성이 기독교를 전파하고, 인종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등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주장도 편다. 서구 문화에서 백인성은 진취적 정신을 상징한다. 육체의 고통을 초월하고 부활한 백인 그리스도의 얼굴, 비옥한 땅을 놀려 먹는 미개한 원주민들을 교화시킨다는 명분으로 침입한 서부 개척자들의 이야기, ‘타잔’에서부터 ‘람보’까지 남성 액션 영화에서 영웅으로 그려지는 근육질의 백인 남성의 몸까지. 백인성의 우월함을 재현해 낸 모티프는 다양하다.

논문을 바탕으로 한 데다, 서구의 문화를 교본으로 삼다 보니 한국 독자 입장에선 낯설게 느껴질 법한 내용이 다수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백인성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크다.

화이트 : 백인 재현의 정치학

리처드 다이어 지음ㆍ박소정 옮김

컬처룩 발행ㆍ430쪽ㆍ2만 8,000원

프랑스 문화연구자 막심 세르뷜은 20주년 기념판에 실은 서문에서 백인성에 대한 ‘무지’야말로 백인 헤게모니를 눈감고 용인해 주는 태도라고 지적한다. “무지란 권력이나 지식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인 위치다. 다이어의 연구는 눈이 멀 지경인 백인 헤게모니의 빛 앞에서 눈을 크게 뜨고 응시할 수 있게 한다.”

당장 우리만 해도 비백인, 유색인이지만, 우리 안의 백인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똑 같은 외국인이라 해도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어두운 피부색의 외국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건 부인할 수 없다. 우리 역시 피부색의 스펙트럼을 쫙 깔아 놓고 인종의 위계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책을 번역한 박소정 연구자는 ‘K-뷰티’ 등 한류가 미백 중심의 미를 생산하고 있는 것 역시 인종주의적 위험을 내포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 흑인 여학생이 “나는 숨을 쉴수 없다”는 문구가 쓰여진 마스크를 쓴 채 인종 차별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휴스턴=AP 연합뉴스

1963년 8월 28일, 노예 해방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미 전역에서 모인 군중은 흑인 해방 운동 지도자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연설에 전율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아이들이 이 나라에서 살며 피부색으로 평가되지 않고 인격으로 평가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평등하다는 이 간단한 명제는 아직도 실천되지 못하고 있다. 그 돌아오지 않는 응답에 책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하나다. “화이트는 특별하지 않다.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또 다른 사람일 뿐이다.” 백인성의 권력을 내려놓을 때 모두가 숨 쉴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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