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범 기자

등록 : 2020.04.30 20:48

냉전 시대 스파이가 지킨 것은 결국 무엇이었나

등록 : 2020.04.30 20:48

조지 스마일리와 피터 길럼이 등장하는 또 다른 시리즈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 영화배우 게리 올드먼이 스마일리를,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길럼 역할을 맡았다.

두꺼비처럼 땅딸막하고 눈에 띄지 않는 외모를 지녔으며,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는 대신 사무실에서 방대한 서류를 정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여성을 유혹하는 기술은 없지만 사람을 꿰뚫어 보는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첩보소설의 제왕 존 르카레의 소설에 등장하는 스파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007시리즈 속 제임스 본드와는 정반대 지점에 있다. 절대 악과 맞서는 영웅이 아닌,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희생된 또 하나의 개인으로서의 스파이다.

르카레의 스물네 번째 장편이자 그의 대표작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1963)의 50여년 뒤를 그리는 ‘스파이의 유산’ 역시 마찬가지다. 함께 헌신한 동료들의 배신과 죽음이 교차되는 가운데 윤리적인 고뇌에 휩싸이는 스파이의 이야기다. ‘추운 나라’를 비롯해 르카레의 소설 대부분에 등장하는 대표 캐릭터 조지 스마일리가 다시 한번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스마일리의 충직한 부하 피터 길럼이다.

스파이의 유산

존 르카레 지음ㆍ김승욱 옮김

열린책들 발행ㆍ456쪽ㆍ1만5,800원

영국 정보부 ‘서커스’에서 은퇴하고 프랑스 시골 농장에서 한가롭게 노년을 보내던 길럼은 어느 날 서커스로부터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고 런던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길럼은 자신들의 부모인 앨릭 리머스와 엘리자베스 골드가 과거 스마일리가 지휘한 윈드폴 작전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이에 관련된 모든 정보의 공개와 징벌적 손해 배상, 책임자의 이름을 포함한 공개 사과를 서커스에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서커스는 관련 소송에 앞서 당시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하지만 관련 문서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스마일리의 지시에 따라 문서를 작성했을 길럼을 소환한다.

스마일리가 윈드폴 작전에 관한 중요한 진실을 의도적으로 은폐했다고 의심하는 서커스는 길럼이 직접 관련 문건을 찾아내고 해석하도록 시킨다. 서커스의 감시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 자신이 직접 작성한 문건을 읽어 내려가던 길럼은 다시 한번 “그때 우리가 했던 일은 결국 무엇 때문이었나”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처음에는 “냉전이 벌어지고 있고, 임무가 떨어졌다면 그냥 임무를 수행할 뿐”이라며 서커스의 압박에 방어하던 길럼이지만, 문건 속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사랑과 동료의 이름을 하나하나 복기해 가며 괴로움에 휩싸인다. 마침내 진실의 몸통인 스마일리와 마주하게 된 길럼은, 스마일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고결하고 추상적인 대의에 밀려서 왜 인간성이 항상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겁니까?”

존 르카레 . 실제 영국 첩보원 출신인 그는 초인적인 영웅이 아니라 조직에 헌신하면서도 윤리적으로 번민하는 고독한 스파이의 이미지를 구축해 냈다. ⓒ Nadav Kandar

냉전은 종식됐고, 스파이들의 활약도 과거의 일이 된 시점에서 르카레가 길럼의 입을 빌려 다시 한번 “그때 우리가 했던 일은 결국 무엇 때문이었냐” 묻는 이유는 하나다. 수많은 목숨을 희생시켜 가며 수호했던 체제와, 그렇게 해서 얻어 낸 냉전 이후의 시대가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냐는 것이다. 최근까지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리틀 드러머 걸), 다국적 제약회사(성실한 정원사), 테러(영원한 친구), 콩고 내전(미션 송), 불법 이민(모스트 원티드 맨) 등 첩보소설의 외피를 입은 사회 소설을 써 온 르카레이기에, 그의 질문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향한 질문일 수밖에 없다.

이제는 다 늙어 버린 스파이 스마일리는, 역시 늙어 버린 자신의 부하인 길럼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우린 무자비하지 않았어, 피터. 한 번도 무자비했던 적이 없네. 더 규모가 큰 연민을 품었을 뿐이지.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할 수는 있네. 우리의 연민이 소용없던 건 확실하니까. 이제는 그걸 알겠어. 하지만 그때는 몰랐지.”

스파이들의 유산은 체제의 승리의 과거의 영광도 아닌, 무수한 희생에 대한 직시와 반성일지도 모른다고, 첩보 소설의 거장이 자신의 분신을 통해 전하는 말이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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