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원 기자

등록 : 2020.02.05 04:30

[집 공간 사람] 따끈한 구들목 서재… 제자들에게 추억 선사하는 ‘책 향 가득한 집’

등록 : 2020.02.05 04:30

※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강원 원주 판부면에 위치한 ‘서향각’.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국문과 출신의 동갑내기 교사 부부가 지은 집이다. ©박완순 건축사진작가

어렸을 적 즐거웠던 집의 추억은 성인이 돼서도 유효하다. 나란히 국문과를 졸업하고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는 동갑내기 박탄(45)ㆍ이효숙 부부에게 집은 햇빛이 쏟아지는 대청에서 뒹굴뒹굴하며 책을 읽었던 추억, 처마 끝에 맺힌 빗방울을 하염없이 바라본 추억, 마당에 고추와 시래기를 펼쳐놓고 말린 추억, 텃밭에서 기른 채소를 식구들과 옹기종기 나눠 먹은 추억으로 압축된다.

강원 삼척과 춘천에서 마당 딸린 주택에서 각각 자라온 부부는 18년 전 결혼하면서 아파트 생활을 시작했다. 부부는 “편의시설도 가깝고 널찍한 구조였지만 층간 소음 등 생활에 불편이 적지 않았다”고 했다. 둘만의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을 키우다가 나이 마흔에 실행에 나섰다. 동네 요가학원에서 우연히 건축가인 원계연 스튜디오더원 소장을 만나면서 집짓기는 꿈이 아닌 현실이 됐다. 2년 전 원주 판부면에 나지막이 들어선 집은 집에 대한 부부의 추억을 다시 잇는 공간이다.

서향각은 대청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부부의 살림 공간, 오른편에는 별채인 서재가 있다. ©박완순 건축사진작가

◇ 여백 많은 집

부부의 집은 한옥은 아니지만 한옥을 닮았다. 마당을 품듯 완만한 시옷(ㅅ)자로 내려앉은 단층집은 가문비나무, 홍송 등 나무로 지었다. 기와는 없지만 알루미늄 지붕 아래 서까래가 드러난 처마가 길게 내려온다. 가로로 길게 뻗은 집은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살림채가, 오른쪽으로는 별채가 있다. 별채에는 구들과 쪽마루가 있다. 집의 창호는 모두 한지로 마감했다.

설계를 맡은 원 소장은 “일부러 한옥적인 요소를 쓰려고 한 건 아니고 한국의 기후에 맞게 주택을 구성하다 보면 자연스레 한옥과 유사해진다”고 말했다. 햇빛을 충분히 집 안으로 끌어들이고, 바람이 잘 드나들게 하려면 집의 켜(공간을 칸칸이 나눈 형태)는 얇을수록 유리하다. 부부의 집은 폭 4.5m, 길이 20m의 얇고 긴 형태이다. 햇볕 조절을 위해 한옥의 처마도 필요했다.

‘서향각’의 전체적 모양은 시옷(ㅅ)자로 완만하게 구부러져 있다. 채광과 환기를 위해서다. ©박완순 건축사진작가

한옥의 처마와 대청, 구들과 쪽마루는 반쯤은 외부 공간이기도 하다. 원 소장은 “지붕이 덮고 있는 전체 면적이 198㎡(60평)에 조금 못 미치고 벽이 둘러쳐진 실내 공간이 99㎡(30평)이 조금 넘으니 집의 절반이 반쯤은 외부 공간이나 마찬가지”라며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들이 실내면적 확보에만 집착하는 데 비해 시골집은 외부와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대청에 앉아서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을 바라보거나, 처마의 선을 따라 떨어지는 빗방울을 감상하거나, 마당에서 반사된 햇빛을 쬐고, 아궁이에 불을 피우는 등 반 외부 공간에서의 활동은 부부에게 크나큰 즐거움이다. “집이라고 하면 집 안만 생각하잖아요, 대청이나 구들은 관리가 어려운 쓸모 없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막상 집에 오면 집 안보다 집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은 거 같아요.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여백의 공간이죠.”

‘서향각’ 내부는 문으로 구분 짓기보다 살짝 비튼 각도로 독립성을 만들어낸다. 주방은 부부의 거실, 서재, 작업실 등 다용도로 두루 활용된다. ©박완순 건축사진작가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하는 부부에게 너른 마당은 무슨 의미일까. 438㎡(132평)의 대지에 집이 차지하는 공간(건축면적)은 147.5㎡(44평)로 건폐율이 33.68%에 불과하다. 집의 70%가 마당이다. 남편은 마당에 잔디와 나무를 심고, 장작을 팬다. 아내는 배추와 파, 오이와 가지 등을 심고, 장독을 파묻는다. 부부는 “백면서생인 우리 부부에게 마당은 답이 없는 숙제와도 같다”며 “돈 들이면 전문가가 와서 예쁘게 조경을 해주겠지만 우리 둘이 조금씩 머리를 맞대고 손을 써서 우리 색깔을 내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향각’의 서재는 부부의 지인과 제자, 이웃들에게 열린 동네 사랑방 같은 공간이다. ©박완순 건축사진작가

◇책 향 가득한 열린 공간

얇고 긴 집은 일렬의 공간으로 이어진다. 거실을 중심으로 각 방들이 달려있는 아파트와는 달리 서쪽 끝 화장실(드레스룸)부터 침실, 거실, 주방, 대청, 서재 순으로 놓여 있다. 벽을 따라 나무로 만든 책꽂이도 두었다. 화장실, 침실과 거실 사이 미닫이 한지 문을 제외하고 나머지 공간들은 문이 없다.

살짝 각도를 비틀어 공간의 독립성을 살리되 용도의 경계는 풀었다. 침실이 거실이 되기도 하고 거실을 침실처럼 쓰기도 한다. 주방이 거실처럼, 서재가 주방처럼 쓰인다. 부부는 “방마다 용도가 정해져 있던 아파트에서는 각 공간에서 뭘 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라며 “여기서는 주방 한 구석에서 화로를 두고 고기를 구우며 무슨 얘기를 했는지, 비 오는 날 거실 소파에서 무슨 책을 읽었는지 아주 소소한 일상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서향각의 서재는 아궁이에 땔감을 넣어 불을 지피는 전통 구들로 난방을 한다. 부부는 “다 커서 하는 불장난 재미가 쏠쏠하다”고 웃는다. ©박완순 건축사진작가

집의 하이라이트는 대청 너머 구들목이 있는 서재다. 책이 삶의 일부에 가까운 부부가 건축가에게 특별히 부탁한 공간이다. 벽면의 나뭇결과 새하얀 한지 문이 수십 권의 고전들과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문간에는 찻잎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렸다.

살림 공간과 달리 서재는 아궁이에 땔감을 넣어 불을 지피는 구들을 쓴다. 구들 위에 흙을 바르고, 그 위에는 부부가 직접 콩기름을 바른 한지를 깔았다. 부부의 애정 어린 손길이 듬뿍 느껴진다.

자녀가 없는 부부는 최근 집에서 10여명의 중학생들과 독서 캠프를 열었다. “대청이나 구들을 경험한 적이 없는 아이들이 집을 너무 재미있게 쓰더라고요. 따끈한 방 구석에서 책 보는 느낌도 알게 됐고요. 아이들이 커서 선생님과 함께 했던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해주지 않을까요.”

집의 조명은 모두 간접 조명이다. 은은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준다. ©박완순 건축사진작가

집은 궁궐이나 관서에 주로 붙이는 각(閣)을 써서 ‘서향각(書香閣ㆍ책 향이 가득한 곳)’이라 이름 지었다. 부부는 다시 유년 시절의 추억을 들추어낸다. “어렸을 때 앞 집 선생님 댁에서 세계명작전집을 빌려 읽었던 기억이 강렬합니다. 지인이나 제자들, 이웃들과 오가며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고 책도 빌려주고, 책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집에 안 가면 어쩌죠.”

원주=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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