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소설가

등록 : 2019.11.27 18:00

[장정일 칼럼] 주술적 정의(定義)를 실천하기

등록 : 2019.11.27 18:00

좌파가 조국 수호에 나서는 것은 유대인이 돼지고기를 먹고 힌두교도가 소를 먹는 것처럼 천부당만부당 하지만, 검찰 개혁을 부르짖었던 이들에게 ‘립서비스(lip service)’를 하는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립서비스의 사전적 의미는 “그럴싸한 말로 비위를 살살 맞추는 일”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이 지면에 연이어 썼던 네 번의 글은 특정인을 옹호하고자 분투했던 게 아니다. 유의미한 핵심은 다음과 같다. ①누구나 저지르는 수행적 모순은 우파보다 좌파의 그것이 더 커 보인다. ②서초동의 시위대는 ‘조국 수호’와 ‘검찰 개혁’으로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 ③한국의 현대사는 대중을 좀 더 탐구해야 한다. ④좌파는 더 나은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 열망을 가진 대중과 연대해야 한다. 네 번째 칼럼(‘좌파 ‘빅텐트’를 위하여’)을 읽고 “더불어민주당이 친 빅텐트에 들어가란 말이냐?”라고 곡해하는 좌파도 있고, 샹탈 무페가 제안한 가치의 ‘등가사슬(a chain of equivalence)’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 “나더러 계급을 포기하라는 말이냐?”라고 반문하는 좌파도 있다. 자기 것만 고집하거나 내 것을 포기하는 것은 등가가 아니다.

이번 ‘조국 사태’에서 투미하고 교조적인 일부 좌파는 서초동의 시위대 전체를 ‘멍청이, 파시스트, 노예’라고 일괄 혐오하는 것으로 대중이라는 전략적 자산을 잃었다. 좌파가 조국 수호에 나서는 것은 유대인이 돼지고기를 먹고 힌두교도가 소를 먹는 것처럼 천부당만부당하지만, 검찰 개혁을 부르짖었던 이들에게 ‘립서비스(lip service)’를 하는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립서비스의 사전적 의미는 “그럴싸한 말로 비위를 살살 맞추는 일”이다.

유대인이라면 샤일록과 같이 냉혹한 고리대금업자를 연상하게 된다. 왜 유럽의 유대인은 그토록 이재에 밝고 눈치 좋은 장사꾼이 되고 말았을까. 여러 분석이 있지만, 톨스토이는 ‘크로이체르 소나타’(웅진씽크빅, 2008)에서 유대인에게는 그 방법 말고는 유럽 기독교인의 맹목적인 저주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없었다고 말한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면서 땀 흘려 노동을 해도, 유럽 기독교인들의 철석 같은 편견을 바꿀 수 없었기에 유대인들은 차라리 이렇게 대응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장사꾼이 되기를 바라시는군요. 좋습니다. 우리가 장사꾼이 돼서 당신들을 지배하겠습니다.”

여성 혐오에 푹 젖은 일부 한국 남자들은 여성들이 자신의 신체 자본(섹스할 수 있는 몸)을 통해 쉽게 신분 상승과 부를 획득한다고 거품을 문다. 이 같은 비방에 대해 윤지선과 윤김지영은 ‘탈코르셋 선언’(사월의책, 2019)에서 “여성의 신체 자원이 채굴, 배분, 활용, 억압되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의 맥락 이해 자체가 상실되어 있고, 성차별적 현실을 의도적으로 지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남성들을 여성들에 의해 부와 특권을 탈취당하고 피해를 보는 계층으로 상정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런 지당한 논리보다는 유대인에 대한 해석에 이어지는 톨스토이의 반어적 설명이 더 흥미롭고 솔깃하게 들린다. 비유와 통찰력이 뛰어났던 그는 여성이 미모와 신체 자본을 가꾸고 과시하게 된 사정을 이렇게 풀이한다(정확한 원문은 207~209쪽에 있다).

“여성은 남자들이 지닌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 이러한 권리의 박탈을 보상받기 위해서 여자들은 남성들의 육욕을 자극하여 그들을 길들이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우리가 육욕의 대상이기만을 바라는군요. 좋아요, 그렇게 하는 대신 당신들을 노예로 만들겠어요’라고 말하는 겁니다. 마치 유대 사람이 박해를 받는 대가로 자본을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죠. 이런 방법을 습득하게 되면 여자들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여성들은 남성들의 육욕을 자극하여 자신들의 그물에 가둠으로써 복수하고 있는 겁니다. 이로 인해 남성들은 여성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남성이 여성의 다양한 성취를 제한하고 성적 대상이 되기만 강요했기에, 여성은 남성들이 욕망하고 갈구하는 그대로가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입진보(Coffee-shop Radicals)는 서초동에 모였던 대중에게 배중률을 들이대며 ‘서초동에는 노동자가 없다’라고 탄핵했다. 조국 사태에서 어떤 입장을 취했든 이제 그 대중들은 ‘좌좀’이 그들에게 내린 주술적 정의를 실천해야만 하는 강박을 얻었다. “예, 알겠습니다. 이제 노동자 따위는 깨끗이 잊어드리죠!” 이것이 좌좀이 저지른 실책이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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