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준 기자

등록 : 2019.12.02 15:48

여름 음원 발라드가 싹쓸이… ‘기계픽’ 사재기 의혹 일파만파

등록 : 2019.12.02 15:48

‘유산슬’(유재석)도 톱100 못들었는데 팔로워 430명 가수는 어떻게….

“1억? 작업비 필요 없다” 수상한 바이럴 마케팅

[저작권 한국일보] 10년 전 차트와 비교하면 현실과 음원 차트 사이 인기의 괴리감은 확연히 드러난다. 2009년 7월엔 2NE1 ‘아이 돈 케어’ ‘파이어’, 소녀시대 ‘소원을 말해봐’, 아웃사이더 ‘외톨이’, 포미닛 ‘핫이슈’, 2PM ‘어게인 앤 어게인’ 등 댄스곡이 톱10을 차지했다. 여름이란 계절적 특성에 맞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기 순위였다. 10년 전 차트와 비교하면 올해 차트를 장식한 발라드 가수와 곡의 인기를 쉽게 수긍할 청취자가 얼마나 될까. 박구원 기자

노래도 계절을 탄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이 되면 ‘벚꽃 엔딩’(버스커버스커)이 이곳 저곳에서 울려 퍼지고, 여름엔 무더위를 날려 줄 ‘해변의 여인’(쿨)이나 ‘빨간맛’(레드벨벳) 같은 흥겨운 댄스곡이 사랑받기 마련이다.

◇10년 만에 최악의 댄스곡 불황 이유

히트곡은 계절의 영향을 받는다는 업계 속설은 지난 여름 산산이 깨졌다. 지난 7월 음원 차트는 ‘발라드 천하’였다. 국내 최대 음원 사이트 멜론의 월간 음원 차트 톱10 중 외국곡 2곡을 제외한 8곡 중 7곡을 발라드가 싹쓸이했다. 한여름에 애틋하고 절절한 발라드 열풍이 분 것은 이상기후현상에 비교할 수 있을 만했다. 2010년부터 2018년까지 9년 동안 7월 월간 차트를 조사해 본 결과 톱10에 댄스곡이 4개 미만이었던 해는 한번도 없었다.

발라드가 잠식한 여름 음원 시장을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7월 차트 톱10에 든 곡 중엔 인기를 체감하기 어려운 발라드 노래가 적지 않았다. 당시 송하예(3위)ㆍ임재현(4위)ㆍ황인욱(9위) 등은 이름이 알려진 가수는 아니었다. 여름과 관련성이 적은 발라드가 음원 상위권에 대거 포진된데다 무명에 가까운 가수들의 이례적인 부각은 차트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의문은 계속됐다. 무명에 가까운 가수의 발라드곡이 차트에서 최근까지 깜짝 선전을 이어갔다. 음원 사재기 의혹 속에서 결국 고름이 터졌다. ‘○○○처럼 ○○○처럼 ○○○처럼 ○○○처럼 ○○○처럼 ○○○처럼 사재기 좀 하고 싶다’. 아이돌그룹 블락비 멤버인 박경이 지난달 24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특정 발라드 가수들의 실명을 줄줄이 언급하며 ‘음원 사재기 의혹’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느닷없는 일은 아니었다. 지난해 가수 닐로와 보컬 그룹 장덕철의 사재기 논란 등으로 새삼 문제가 됐던 차트 순위 왜곡 의혹이 불신으로 쌓여 폭발한 결과다.

[저작권 한국일보] 아이돌 그룹 블락비 멤버인 박경이 지난달 24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특정 발라드 가수들의 실명을 줄줄이 언급하며 ‘음원 사재기 의혹’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송정근 기자

◇“음원 사재기와 바이럴 마케팅 결합”

사재기와 발라드의 차트 싹쓸이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대중음악업계에서는 발라드가 수상한 마케팅의 온상이 되기 쉽다고 본다. 10년 넘게 음악 제작을 해 온 한 기획사 대표는 “발라드는 따라 부르기 영상 등을 제작하기 쉬워 온라인에서 곡을 인위적으로 띄우고선 ‘페북픽’(페이스북 사용자들이 즐겨 듣는 곡)이나 바이럴 마케팅(소비자를 통해 제품 알리기)의 힘으로 포장하기 용이하다”라고 주장했다.

차트 왜곡 현상을 취재하기 위해 접촉한 대중음악 관계자 8명은 일부 제작자와 업체가 바이럴 마케팅과 사재기를 교묘하게 결합해 차트 순위를 왜곡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김상화 음악평론가는 “유재석이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변신해 낸 노래 ‘합정역 5번 출구’는 지난달 멜론 톱100에도 들지 못했다”라며 “ ‘페북픽’이라고들 하는데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가 수백 혹은 수천 명밖에 안 되는 가수의 발라드 곡이 톱10에 오르는 게 이상하다고 보는 건 합리적 의심”이라고 말했다. 7월 톱10에 오른 가수 중 한 명은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가 430여 명(1일 기준)에 그쳤다. 팔로어 수로만 보면 보통 이용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데 온라인에서의 입소문만으로 음원 차트에서 빛을 봤다는 논리를 공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박경이 사재기 의혹을 제기한 음악인 6명 모두 의혹을 부인하며 박경을 상대로 “명예훼손 고소”로 맞대응했지만, 의혹의 불길이 쉬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다.

◇“톱 30에 들면 수익 나누자” 제안

한 기획사 대표인 A씨가 한국일보에 들려준 수상한 마케팅 제안 과정은 이랬다. A씨는 올 초 소속 가수 SNS로 바이럴 마케팅 의뢰 메시지를 접했다. ‘바이럴 마케팅 노하우로 음원 차트 30위 권에 들어가게 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가수가 미리 돈을 댈 필요도 없었다. 업체가 요구한 계약 조건은 특정 곡이 톱30에 올라가면 그 이후 1년 동안 발생하는 음원 수익의 80%를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A씨는 “계약 조건엔 ‘추후 사재기 동원 사실이 밝혀지면 업체가 법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라며 “우리가 돈을 미리 태우지(지불하다란 뜻의 속어) 않아도 됐지만 바이럴 마케팅만으로 톱30에 진입한다는 것 자체를 믿기 어려워 제안을 거절했다”라고 귀띔했다.

일부 업체가 바이럴 마케팅을 내세워 제작자와 음원 수익 공유 계약을 맺고, 순위를 인위적으로 올려 음원 시장을 교란하고 있는 만큼 포괄적으로 법률적 검토를 해 규제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음악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제26조는 ‘음반ㆍ음악 영상물 관련 업자 등이 제작ㆍ수입 또는 유통하는 음반 등의 판매량을 올릴 목적으로 해당 음반 등을 부당하게 사거나 관련된 자로 하여금 부당하게 구입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21세기 러다이트 운동’ 물결

차트 왜곡 논란의 불씨는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래퍼 마미손은 지난달 26일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며 음원 사재기 의혹에 기름을 부었다. 마미손은 곡에서 “기계를 어떻게 이기냔 말인가, 내가 (알파고와 대국한 바둑기사) 이세돌도 아니고”라고 노래했다. ‘기계픽’(기계가 선택)으로 추정되는 노래에 밀려 자신의 노래는 차트에서 맥을 못 춘다고 믿는 가수로서의 한탄이다.

일부 네티즌 사이에선 ‘기계픽’으로 오염됐다고 믿는 음원 사이트 거부 움직임까지 일고 있다. SNS엔 ‘#21세기 러다이트 운동’이란 해시태그 게재가 잇따랐다. ‘기계픽’ 의혹에 휩싸인 차트 거부 운동을 19세기 벌어진 기계 파괴 운동 러다이트에 빗댄 것이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은 “공정이 화두인 시대에 공정한 시장 질서에 대한 욕망의 거센 표출”이라고 현상을 분석했다.

◇거세지는 실시간 차트 폐지 요구

차트 왜곡 의혹이 커지다 보니 한국콘텐츠진흥원 산하 콘텐츠공정상생지원단은 바이럴 마케팅과 결합한 사재기 의혹을 들여다보고 있다. 콘텐츠상생지원단 관계자는 “음원이 뜨면 SNS도 움직이기 마련이라 그 확산 과정과 연관성을 조사하고 있다”라며 “법률 검토를 끝내면 음원사이트에 사용자 데이터 등을 요구해 특정 음원의 인기가 바이럴 마케팅 덕인지 아이디 도용 혹은 매크로 프로그램 작동의 결과물인지 등을 검토해 보려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재기 의혹을 규명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2월 “데이터상으론 사재기 혐의를 찾을 수 없다”라고 밝혔고, 6년 전 SMㆍYGㆍJYP엔터테인먼트 등 K팝 기획사들이 음원 사재기 브로커를 검찰에 고발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이 내려진 바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음원사이트에 사용자가 사람인지 기계인지를 구분하는 보안 도구인 ‘캡차(CAPTCHA)’를 활용하자는 의견까지 제기됐다. 증권시장에서 이상 매매가 감지되면 서킷브레이커를 작동해 거래를 일시 중단하는 것처럼 비정상 사용 흐름이 감지된 음원은 불시로 특정 숫자나 문자로 사용자를 확인하는 보안 설정을 통해 ‘기계픽’을 걸러내자는 주장이다. 김진우 가온차트 수석연구위원은 “사용자 불편은 예상되지만 차트의 신뢰 회복 차원에서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의견을 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선 음원사이트가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실시간 차트를 폐지해야 한다는 지적도 다시 거세게 일고 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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