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등록 : 2018.09.17 04:40

노무현이 열망한 ‘사람 사는 세상’... 진보의 시대적 과제로 남다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30> 노무현의 '진보의 미래'

등록 : 2018.09.17 04:40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강원도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강원도선거대책본부 및 국민참여운동 강원본부 발대식에 참석 귀빈인사에 박수를 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정희 대통령이 광복 이후 보수를 대표한 정치가라면, 진보를 대표한 정치가는 누구일까. 많은 이들은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지목할 것이다. 김대중은 박정희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여기서는 김대중이 아니라 노무현을 다루려고 한다. 그 까닭은 더없이 극적이었던 노무현의 삶과 정치가 이른바 ‘386세대’를 포함한 젊은 세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데 있다.

2009년 노무현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그를 추모하는 칼럼을 썼다. “노무현이란 이름은 복수로 존재했다. 정책 입안가로서 노무현, 인간적 정치가로서 노무현, 그리고 시대정신으로서 노무현이 있었다. 그의 급작스러운 서거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적 정치가와 시대정신으로서 노무현을 새삼 일깨우게 했다.” ‘인권변호사’이자 ‘대통령’이자 ‘시대정신’이 노무현이라는 정치가의 정체성을 이뤄왔던 것으로 보인다.

2003년에서 2008년에 이르는 노무현 시대는 1987년 시작된 민주화 시대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진보 세력은 2003년 노무현정부를 출범시켰고, 2004년 총선에서도 승리했다. 하지만 시장과 공론장에선 보수 세력이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다수였지만 사회적으론 소수였던 게 노무현정부가 마주한 시대적 조건이었다. 그만큼 노무현 시대에는 보수와 진보의 긴장이 내내 뜨거웠다.

◇노무현 시대의 회고

노무현은 1946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다음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법 판사를 지냈다. 1978년 변호사를 개업하고 인권변호사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1987년 민주화 시대가 열리자 국회의원이 됐고,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맡았다. 노무현의 삶에서 극적인 전환은 2002년에 주어졌다. 그는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됐고, 12월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이 추구한 것은 민주화의 진전과 심화였다. 이를 위해 노무현정부는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라는 3대 국정 목표를 내걸었다. 참여민주주의와 균형발전이 대내적 목표였다면,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번영은 대외적 목표였다. 구체적으로 노무현정부는 권력기관의 민주화와 시민사회와의 거버넌스를 모색해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의 생산적 결합을 추진했다. 또 행정수도 이전, 공공기관 이전 등의 과감한 균형발전 정책을 통해 중앙 대 지방, 지방 대 지방의 불균형을 해소하려 했다. 나아가, 김대중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계승하고 미국 중심 외교정책에서 동북아 중심 외교정책으로 전환하려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노무현정부가 마주한 또 하나의 시대적 조건이다. 노무현 시대는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와 세계화가 극적으로 교차하고, 이 둘이 충돌하는 갈등에 내내 대면해 있던 시대였다. 세계사적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지향하는 보수의 시대가 절정에 도달한 가운데 진보적 가치를 추구해야 했던 게 노무현정부가 놓인 시대적 운명이었다. 이런 구조적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노무현정부는 최선을 다했지만, 집권 당대에는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노무현의 시대정신

‘진보의 미래’는 노무현이 대통령을 퇴임한 다음에 집필한 책이다.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가 그 부제다. 이 책은 미완의 저작이다. 노무현은 2008년 10월 참모진과 가까운 학자들에게 진보주의 연구모임을 제안하고 비공개 연구 카페를 열었다. 여기에 자신의 생각과 구상을 올리고 이를 놓고 토론했다 ‘진보의 미래’는 바로 이 내용을 담고 있다. 서문에서 노무현은 말한다.

“진보주의에 관한 책을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 미래의 역사는 진보주의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사회적 논쟁의 중심 자리를 차지해야 지역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진보의 현재에 대한 진단과 그 미래에 대한 모색이 이 책이 겨냥하는 목표다. 책의 차례를 보면 노무현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직접 작성한 원고로 이뤄진 제1부는 ‘국가의 역할을 고민하자’, ‘보수의 시대, 진보의 시대’, ‘보수의 주장, 진보의 주장’, ‘진보란 무엇인가, 보수란 무엇인가’, ‘세계는 진보의 시대로 가는가’, ‘한국은 지금 몇 시인가’가 주요 내용을 이룬다. 이어지는 제2부는 제1부의 주제들을 생생한 육성으로 전달한다.

이 책은 노무현의 시대정신과 정치철학을 돌아보게 한다. 대통령이 되기 전 노무현이 소망한 것은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였다. 그에 따르면, 격렬한 산업화를 지나오면서 비상식과 반칙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가 됐고, 그 결과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반칙으로서의 특권이 횡행하는 사회가 됐다. 5년의 국정 경험은 상식과 원칙이 존중받기 위해선 무엇보다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그로 하여금 깨닫게 했다. 그는 말한다.

“결국 국가의 역할에 관한 문제는 누가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을 지배하는 문제이자 정치와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의제이다. (...) 성장과 분배, 감세와 복지를 둘러싼 논쟁, 민영화, 탈규제, 노동의 유연화, 개방, 작은 정부, 이런 논쟁이 정부의 역할에 관한 논쟁이다.”

노무현이 제시하는 진보의 일차적 과제는 새로운 분배 및 재분배 정책의 수립에 있다.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시장의 분배인 노동영역과 정부의 분배인 복지영역에 국가가 어떻게,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가가 이 과제의 핵심을 이룬다. 요컨대, 노동시장정책과 복지정책의 재구성이 진보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과제라고 노무현은 주장한다.

시대정신이 한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의 집약이라면, 노무현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 사는 세상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나라가 아닌 ‘함께 사는 사회’와 ‘더불어 사는 국가’를 추구한다. 함께, 그리고 더불어 사는 국가와 시민사회가 산업화와 민주화의 바탕 위에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미래라는 점을 노무현은 강조한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2009년 5월 그는 돌연 우리 곁을 떠났다.

진보의 미래. 동녘 제공

◇진보의 현재와 미래

진보란 변화를 통해 더 나은 삶과 사회를 모색하려는 사상적·정치적 기획을 통칭한다. 서구사회에서 근대 이후 진보는 17·18세기의 계몽주의와 19세기의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됐고, 20세기에 들어와선 ‘자본주의 안 개혁’을 모색한 사회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밖 혁명’을 추구한 국가사회주의로 분화되고 발전해 왔다. 오늘날의 진보는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미국의 진보적 자유주의, 그리고 생태주의·페미니즘의 급진 민주주의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진보의 역사는 담론과 정치의 두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담론의 측면에서 진보는 1950년대에 냉전분단체제가 공고화되면서 사실상 불허됐다. 그러다 1970년대 이후 박현채의 ‘민중경제론’, 한완상의 ‘민중사회학’, 이효재의 ‘분단사회학’ 등을 통해 깨어나기 시작했고, ‘사회구성체 논쟁’을 거치면서 학문적 시민권을 얻었다. 1980년대 이후 진보주의는 민족해방주의, 민중민주주의, 시민사회론 등으로 분화되면서 이론적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1987년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현실 정치의 차원에서 진보에는 중도적 경향과 급진적 경향이 공존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평화민주당에서 더불어민주당에 이르는 중도진보적 흐름의 변화였다. 이 흐름은 민주화 시대 초기에 중도적 경향이 두드러졌지만 21세기에 들어와선 점차 진보적 경향을 강화해 왔다. 퇴임 후 노무현이 발표한 ‘진보의 미래’는 이러한 진보적 경향의 강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노무현정부 이후 진보는 두 차례 대선에서 보수에게 잇달아 패배했다. 그리고 박근혜정부의 조기 퇴진에 따른 2017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21세기의 미래에서 진보에게 부여된 주요 과제는 세 가지다. 시장의 적절한 제어, 사회적 약자의 보호, 개인적 자율과 공동체적 연대의 생산적 결합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인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강조하듯, 사회변동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정책의 부단한 혁신만이 진보의 가치를 지킬 수 있다. 이러한 혁신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우리 사회 진보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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