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등록 : 2020.05.18 04:40

[김영민 연재] 숭유억불 조선, 뒤로는 불교를 인정했다

등록 : 2020.05.18 04:40

[김영민 교수 한국이란 무엇인가] <12>역사 속의 불교

※‘칼럼계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한국의 정체성, 역사, 정치, 사상, 문화 등 한국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찾아 나섭니다. ‘한국일보’에 3주 간격으로 월요일에 글을 씁니다.

불기 2564년 부처님오신날인 4월 3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국난 극복을 위한 '희망의 등' 점등식이 열리고 있다. 봉축 법요식은 코로나19로 인해 5월 30일로 연기됐다. 연합뉴스

올해의 부처님오신날은 4월 30일이었으나, 봉축 법요식은 5월 30일로 연기되었다. 조계종은 “불교의 정체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초래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한 뒤에 성대하게 잘 치르고자 봉축 법요식을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사실, 축제를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다 보면 자칫 유행 중인 코로나바이러스가 더 확산될지 모른다. “불교의 정체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는 조계종이 종교성과 세속의 긴장 속에서 봉축 법요식을 가까스로 연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국가와 민족을 한껏 고려하는 불교계의 입장은 매해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각 종단이 발표하는 봉축 법어나 성명에도 잘 드러나 있다. 불교에 따르면, 인생은 고해이며, 고해는 집착에서 온다, 그러니 국가와 민족 같은 것도 결국 인간의 집착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라고 말할 법도 한데, 그런 언명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역대의 봉축 법어나 성명에는 “선열들의 애국심” “5천 년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 “불교(佛敎)는 1,700년간 우리 민족정신문화의 근간(根幹)”과 같은 애국애족(愛國愛族)적인 표현이 넘친다. 그뿐 아니라, 부처님오신날 봉축식에는 문화부 장관이나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왔다.

교황의 대표적 굴욕 중 하나로 꼽히는 ‘아나니 사건’. 1303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자신이 태어난 곳이자 교황 별궁이 있던 아나니(Anagni)에서 귀족 가문 출신 시아라 콜로나에게 붙잡힌 뒤 뺨을 얻어 맞고 있다. 교황은 그 충격으로 한달 만에 사망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세속의 정치 권력과 종교조직이 이처럼 늘 큰 긴장 없이 지내온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유럽 역사에서 세속의 정치 권력과 가톨릭 교회는 자주 갈등과 긴장을 빚었다. 그 중 1077년에 있었던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L'umiliazione di Canossa)은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4세가 격돌한 끝에,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맨발로 찾아가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황이 늘 우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인리히 4세는 나중에 교황을 폐위시키는 데 성공하고, 그레고리오 7세는 객사한다. 그뿐이랴. 1303년 교황청과 갈등을 빚던 로마의 콜로나 가문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아니니(Anagni)에서 생포한다. 시아라 콜로나(Sciarra Colonna)는 교황에게 욕설을 퍼붓고 뺨을 때리며 구타했고, 교황은 그 후유증으로 죽고 만다.

동아시아의 불교라고 해서, 세속권력과의 관계가 시종일관 평화로웠을 리는 없다. 왕이나 승려나 모두 자기 영역에서 최고의 권위를 천명하고 있기에, 양자의 관계는 미묘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 고민의 흔적이 동진(東晉 317~420)의 혜원(慧遠 334–416)이 지은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에 잘 드러나 있다. 과연 승려들은 왕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 혜원에 따르면, 불교 성직자들은 왕에게 꼭 절을 할 필요는 없으나, 일반 불교도들만큼은 왕에게 절을 해야만 한다. 인간에게는 영혼의 구원과 세속의 질서가 다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한 일종의 타협책이다.

이 문제는 그 이후에도 지속된다. 송나라 태종이 상국사(相國寺) 불상 앞에서 향을 태울 때, 나도 절을 해야만 하느냐고 찬녕(贊寧) 화상에게 물은 적이 있다. 찬녕 화상은 그럴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가. ‘삼국사기’는 신라의 승려 원광(圓光)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를 전한다. 진평왕(眞平王)은 수(隨)나라 병사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원광에게 ‘걸사표’(乞師表, 군사를 청하는 글)를 지으라고 명한다. 그러자 원광은 대답한다. “자기가 살려고 남을 멸하는 것은 승려의 할 짓이 아니지만, 제가 왕의 나라에서 먹고 사는 처지에 어찌 감히 명령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군사를 청하는 일이 승려가 할 짓이 아니라는 점을 원광이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살려고 남을 멸하는”(求自存而滅他) 일에 가담한다.

조선의 경우는 어떤가. 조선 시대에 이르면 불교는 억압되고 소위 유교가 흥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유명한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辨)만 읽으면, 마치 조선 건국 엘리트들이 불교를 갈아 마실 듯이 증오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실상을 살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불교 비판 담론은 유행했지만, 건국 엘리트들은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가감 없이 수긍하기도 했다.

소위 조선 유학의 기틀을 만들었다는 권근(權近)조차 불교의 역할을 인정할 때는 거리낌이 없었다. 지방의 험한 산골에는 맹수와 도적이 설치고 있는데(山谷阻絶之處...虎豹之可畏, 盜賊之可虞), 승려들이 바로 그러한 지방의 숙박시설인 원(院)의 설립에 크게 기여했다고 권근은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결국 승려들의 도성 출입금지 정책을 추진하여, 도성 내의 불교 흔적을 지우기 시작한다. ‘경국대전’에는 유생(儒生)이나 부녀자가 절에 가면 곤장 100대를 친다는 조항과 도성 내 사찰의 신설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다. 그리고 영조 때의 ‘속대전, 금제조(禁制條)’에는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조항이 실려 있다. 1895년 음력 3월에 와서야 ‘고종실록’에 승려들의 도성 출입금지 완화를 허락하는 조치가 나오는 것을 보면 적어도 조선 시대에 도성 내 불교 억압이 진행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에 관련하여 1918년에 출간된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질의를 담고 있다. “조선 시대의 금령은 매양 성문 출입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바는 어찌 성문 밖이라 하여 유독 국왕의 영토가 아니며 또한 국왕의 법과 무관하다는 것인가? 승려가 사악하다고 하여 도성 출입을 금지한다면, 성 밖의 백성은 무슨 죄가 있는가?” 꼭 성 밖의 백성들을 무시해서 그랬을까. 국가의 능력이 부족해서 성 밖까지 금지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성 밖에서는 사찰과 승려가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소위 유학적 계몽 군주라는 정조(正祖)의 강론집, ‘일득록’(日得錄)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발언이 실려 있다. “승려들이 떠돌아다니며 입고 먹는 것은 가증스럽다고 하겠다. 또한, 떠돌아다니며 입고 먹는다 라고만 할 수도 없다. 우리나라의 지방은 도처가 다 깊은 산과 험한 골짜기이다. 만약 사찰이 별처럼 바둑알처럼 늘어서 있지 않았다면, 강도의 소굴이 되고야 말았을 것이다. 이에 승려들도 도움이 없다고 할 수 없다.” (僧徒之游衣游食。固可憎....亦未可謂游衣游食. 且我國地方, 到處皆深山絶峽. 若無寺刹之星羅棊列者, 必盡爲強盜窟穴, 於是乎僧亦不爲無助.) 이러한 정조의 발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를 새삼 깨닫는다.

2019년 7월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한국불교 지도자 초청 오찬 간담회에서 조계종 총무원장인 원행 스님의 인사말을 듣고 박수를 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실로, 우리나라에는 산지가 많았구나. 1910년에 시행된 조선토지조사사업에 따르면, 조사된 2300만 헥타르 중 1813만 헥타르가 산지였다. 정조의 말을 통해, 조선 후기의 국가 공권력이 산지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엄청난 양의 영토에 국가의 힘이 가 닿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숭유억불(崇儒抑佛)이라는 표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사찰이 지방에 아주 많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765년에 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는 한성부를 뺀 지역의 사찰 수를 1,524개 정도로 전하는데, 이는 1530년에 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1,638개라는 전국 사찰 수에 비해 크게 줄어들지 않은 숫자이다.

정조의 말을 통해, 그 많은 사찰들은 다 나름대로 국가에 필요한 존재들이었기에 남아 있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아무리 이데올로기적으로 억불(抑佛)을 외쳐도 현실적 필요가 있으면 국가와 종교는 공조한다는 사실을 여기서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선거철에 정치인들이 종교계 인사를 부지런히 만나러 다니는 모습을 보며, 정치권이 얼마나 종교 교단의 힘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종교 조직들이 국가의 촉수가 채 미치지 못한 영역에서 여러 활동을 해왔음을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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