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주 기자

등록 : 2020.06.18 17:43

‘태평양 전쟁의 사생아’ 한국전쟁, 기억하지 않으면 비극은 반복된다

등록 : 2020.06.18 17:43

참혹한 전장에서도 희망은 피어 올랐다. 한국전쟁 당시 한 소년 병사가 철모에 진달래를 꽂은 채 미소 짓고 있다. 혹독했던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 왔듯, 지긋지긋한 전쟁도 어서 물러가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서울셀렉션 제공

미국에서 한국전쟁은 ‘잊힌 전쟁(Forgotten War)’으로 불린다. ‘역사의 고아’ 취급도 받는다. 수백만 명의 미군과 연합군이 참전해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음에도 승전도 패전도 아닌 정전이란 불안정한 상태로, 이도 저도 아니게 봉합된 탓이다.

달라진 건 없다. 70년 전, 이 땅 한반도에서 벌어진 민족 상잔의 비극은 현재진행형이다. 남북 정상이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를 다짐하며 손을 맞잡은 지 채 2년여 만에 신뢰는 와르르 무너졌고 배신감은 더 깊은 상처를 안겼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6ㆍ25 전쟁은 잊고 싶은 전쟁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럴수록 또 다른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더 기록하고, 기억하고 되새겨야 한다. 학술 연구와 증언, 사진으로 한국전쟁을 다양하게 써 내려간 책들을 모았다.

국군과 인민군의 탈환과 재탈환을 거치며 큰 피해를 입은 수원. 한쪽이 형체도 없이 무너져 내린 수원 화성의 장안문이 위태롭게 서 있다. 서울셀렉션 제공

◇남태평양 섬나라가 될 뻔했던 대한민국

‘한국전쟁-전쟁을 불러온 것들, 전쟁이 불러온 것들’은 한국전쟁을 둘러싼 한미ㆍ한일, 미일관계의 시각으로 한국전쟁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한미관계사와 한국전쟁사를 연구해 온 이상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논문을 엮은 것이다. 그간 한국전쟁 연구는 분단의 내재적 원인 또는 세계 냉전 차원의 틀로만 분석되는 한계에 봉착했다. 이에 저자는 한국전쟁이란 역사적 렌즈로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이해 변화, 일본의 재군비로 촉발된 뒤틀린 한일관계의 기원 등을 복합적으로 들여다본다.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극동지역의 전쟁범죄자들을 심판했던 극동국제군사재판, 일명 도쿄재판으로 시작한다. 한국전쟁의 개전은 1950년이지만, 1945년 2차대전 종전이야말로 한국전쟁의 역사적 기원으로 보기에 그렇다. 저자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종결과 함께 새로운 국제관계가 출현했고, 그 결과이자 원인이 예기치 않던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졌다며 “한국전쟁은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사생아였다”고 진단한다.

한국전쟁

이상호 지음

섬앤섬 발행ㆍ328쪽ㆍ1만9,000원

도쿄재판에서 일본의 전쟁 책임을 벗겨준 미국 입장에서 한반도는 일본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방파제에 불과했다. 미 군부에게 일본은 반드시 지켜야 할 전략선이었지만 한반도는 그 대상이 아녔다. 갑작스러운 북한의 남침에 부산까지 피란 내려 간 한국정부를 놓고 미국이 남태평양으로 이전계획을 세웠다는 사실도 새롭게 드러났다. 지금까지 알려진 건 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망명정부를 요청했다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미국 노퍼 맥아더 아카이브에서 열람한 극동군사령부 문서에 따르면 미국이 한국정부의 해외 이전을 본격적으로 검토한 건, 1951년 1ㆍ4후퇴 직후 중공군의 가세로 국군과 연합군의 전황이 불리해지던 시기였다. 처음 대상지는 제주도였으나 안전상의 문제와 소련과의 제3차 세계대전 대비 등을 이유로 남태평양의 사이판과 티니안이 거론됐다고 한다. 이전 규모는 최대 50만명으로 A급(중앙공무원, 군대, 경찰) B급(종교 및 전문직 지도자)인사와 선별된 포로들이 대상이었다.

저자는 이 같은 계획은 단순히 망명정부가 아니라 제3차 세계대전의 최후 국면에서 한반도로의 재진입이란 전략적 차원에서 이뤄진 비상조치의 일환이었다고 설명한다. 이 밖에도 맥아더 사령부의 삐라 선전 정책을 예로 들어 한국전쟁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간의 첨예한 이데올로기 대리전이었다고 분석하고, 기독교를 위시한 미국주의, 아메리카니즘이 한반도에 뿌리 내리게 된 과정을 살핀 것도 흥미롭다.

생필품만 챙겨 서둘러 떠나는 피란민 가족. 어머니의 왼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는 징집을 당한 아버지의 부재를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깍지 낀 두 손으로 어린 막내를 꼭 끌어안은 여자 아이의 시선이 애처롭다. 반면 오빠로 보이는 소년은 처음 보는 카메라가 신기해서인지 해맑게 웃고 있다. 서울셀렉션 제공

◇70년 묻혔던 전쟁의 언어를 다시 쓰다

지금껏 전쟁사를 논할 때 기억의 주체는 대개 힘 있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 집중됐다. 한국전쟁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전투에 나선 군인, 협상을 지휘한 정치인들의 공식화된 서술이 역사로 쓰였다. 정작 혼돈의 시대를 살아간 평범한 인간들의 삶은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다. ‘한국전쟁, 전장의 기억과 목소리-지역민에게 듣는 옹진이야기’는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역사의 공백을 메워주려는 시도다. 한국전쟁 당시 국가범죄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해온 저자는 2018년 10월부터 3개월 간 옹진군 주민 104명을 면담해 한국전쟁에 대한 증언을 모아 드러나지 않았던 역사를 끄집어낸다.

한국전쟁, 전장의 기억과 목소리

신기철 지음

역사만들기 발행ㆍ308쪽ㆍ1만8,000원

왜 하필 옹진이었을까. 수많은 섬으로 이뤄진 옹진은 분단 이후에도 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등이 발발한 ‘한반도의 화약고’다. 전쟁 당시에도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진 분단의 최전선으로 한국군과 인민군의 전선이 끝없이 교차되며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바다 한 가운데 고립돼 있어 비극은 드러나지 못하고 묻혔다. 옹진의 청년들은 군인이 아닌데도 전투에 동원돼야 했고, 인민군 점령과 한국군 수복이 반복되며 민간인 학살도 끊임 없이 자행됐다.

“군인보다 우리가 더 죽었어. 군인들은 싸우다 죽는다지만, 우리는 맨 몸에 밥 가지고 가다 많이 죽었어.” 옹진에 주둔한 국군이 인민군을 상대로 국지전을 벌일 때 주민들이 노무부대나 보급대에 동원돼 목숨을 잃었다는 연평도 주민의 증언부터 해상에서 어로작업 중 돌발상황으로 북방한계선을 넘었다가 수년 동안 억류돼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는 백령도 주민의 이야기까지. “목격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모두 목격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연대하게 되고, 역사는 현재화될 수 있다.” 70년간 발화되지 않았던 전쟁의 언어는 그렇게 다시 쓰였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한 소년이 추락한 북한 전투기의 잔해 위에 올라 손을 흔들고 있다. 활짝 피어난 웃음 속에 강인한 삶의 의지가 느껴진다. 서울셀렉션 제공

◇가냘픈 희망을 잃지 않고 버텨냈기에

참혹한 전쟁에 두 동강이 났을지언정 한반도는 살아남았다. 캄캄한 전쟁의 터널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버텨낸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개전부터 정전까지 미국 기자 중 한국전쟁을 가장 오랫동안 취재한 종군기자 존 리치의 컬러 사진집 ‘1950’에는 전쟁통에도 강인한 삶의 의지를 드러낸 인간 군상들의 일상 풍경이 담겨 있다.

1950

존 리치 지음

서울셀렉션 발행ㆍ320쪽ㆍ2만원

철모에 진달래를 꽂고 봄을 기다리는 소년병, 부서진 북한 전투기 위에 올라 환히 미소 짓고 있는 까까머리 소년, 서둘러 떠난 피란길에서도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아이, 폐허가 된 도시에서 좌판을 깔고 각종 중고 물품을 팔고 나선 사람들까지. 저자의 고향집 지하실에 보관돼 있던 필름이 50년이 지나서야 발견되며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생생하고 선명한 색채의 컬러사진은 70년 전 시대의 격랑 한복판으로 우리를 이끌며 당부의 말을 건네는 듯 하다. 비극 속에서도 살아 남겠다는 희망의 끈을 결코 놓아선 안 된다고 말이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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