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하 기자

등록 : 2019.07.02 11:14

성별 구분도, 나이 구분도 없다… 미투가 만들어낸 3무(無) 연극

등록 : 2019.07.02 11:14

남산예술센터 ‘묵적지수’

남산예술센터의 올해 세 번째 시즌 프로그램인 ‘묵적지수’ 에서는 왕도 장군도 사상가도 여성 배우가 맡는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그것은 과정에 불과하오.”

“왕께서는 과정이라 하는 것을 세인은 삶이라 하지요.”

2,500년 전 중국 전국시대의 강대국이던 초나라 군주 혜왕은 약소국인 송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계획한다. 당시로는 최첨단 공격 무기인 운제(성벽을 공략하기 위한 이동형 사다리)도 개발한다. 침략전쟁에 반대하는 사상가 묵적은 혜왕에게 모의 전쟁을 치르자고 제안해 실제 전쟁을 막아보려 한다. 전쟁을 겪어내는 ‘과정’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참혹한 일인지를 설파하는 묵적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 사상가였던 셈이다. 묵적과 이를 따르던 묵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 ‘묵적지수’는 작품 제작에서도 과정을 중시했다.

제작진은 여전히 한국에 남아 있는 ‘위계에 의한 폭력’이 고대 중국의 전쟁 폭력과 다른 것이 아님을 작품을 통해 말한다. 제작진은 무대 밖에서도 묵가 사상을 만나려고 한다. 이런 시도는 제작과정에서 위계질서를 타파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성별에 의한 배역 제한, 연령에 따른 위계, 장애인 관객 차별 등 3가지가 없는 3무(無) 연극이다. 젠더 프리 캐스팅이나 배리어 프리(barrier freeㆍ장애인에게 차별적인 물리적, 제도적 장벽을 허무는 것) 연극을 시도한 작품은 있었지만 이를 모두 시도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으레 남성의 이야기로 인식돼 온 전쟁 서사지만 ‘묵적지수’에서는 혜왕도, 묵적도, 장군인 자발도 여성 배우가 연기한다. 연출가도 여성이다. 그 동안 여성과 소수자, 청소년 문제를 섬세하게 다뤄 온 이래은 연출가와 극단 달과아이가 남산예술센터와 협업했다. 궁녀 역할을 남성 배우가 맡기도 해, 9명의 출연진 중 극중 성별과 배우 본인 성별이 일치하는 건 4명뿐이다. “오늘날의 전쟁을 떠올리니 ‘미투 운동’과 여전히 성 위계질서와 싸우고 있는 여성 배우들이 생각났어요. 여성 배우들이 협소한 배역에서 벗어나 다양한 연기를 하도록 하는 게 미투 이후 창작자로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젠더 프리 캐스팅을 시도하게 됐습니다.”(이래은 연출가)

남산예술센터 '묵적지수'. 서울문화재단 제공

나이로 인한 위계와 차별을 염려해 제작진은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꾸렸다. 최근 열린 프레스콜에서 이 연출가는 “책임감 있는 역할을 20대가 맡는 등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스태프를 구성했다”며 “예전 방식보다 작품 제작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은 아니지만, 작품을 대하는 감각 자체가 바뀌는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관객이 신체적 차이로 인해 겪는 공연 경험의 불평등도 최소화하기 위해 배리어 프리 공연을 실현하고자 했다. 휠체어도 드나들 수 있도록 무대 장치 반입구를 관객 출입구로 만들어 장애인과 비장애인 관객의 출입구 구분을 없앴다. 공연을 소개하는 리플릿에는 점자를 새겼고, 공연 중에도 배우들의 행동을 묘사하거나 무대와 의상을 설명하는 음성해설 서비스를 마련했다. 배우들의 대사와 효과음 등을 표시한 자막과 수화 통역사 2명을 통해 청각장애인들도 공연을 관람할 수 있게 준비했다.

남산예술센터는 지난 4월 공연된 ‘7번국도’를 시작으로 ‘명왕성에서’에서도 배리어 프리를 시도했다. 이들 작품에서 자막프로그램과 음성해설을 담당한 강내영 사운드플렉스 대표는 “극장 접근성에 대해 고찰하는 연극 관계자들이 많아졌다는 걸 실감한다”고 말했다. 7월 말 남산예술센터에서는 공연관계자를 대상으로 한 배리어 프리 공연 워크숍도 열린다. 다만 ‘묵적지수’는 주연 배우의 부상으로 6월 공연을 취소하고 7월 낭독공연으로 관객을 만나기로 했다. 낭독공연 역시 배리어 프리를 추진한다. 전 공연은 무료로 열린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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