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나래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

등록 : 2019.10.19 10:32

[조선왕실의 취향] ‘앵두’ 사랑 유난했던 세종, 그 이유 있었으니…

등록 : 2019.10.19 10:32

※ 조선왕실이라 하면 치열한 궁중암투만 떠올리시나요. 조선의 왕과 왕비 등도 여러분처럼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한 곳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소개합니다.

<4>세종이 사랑한 과일, 앵두

서울 창경궁 옥천교 인근에 앵두나무 꽃(왼쪽)과 살구나무 꽂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문화재청 제공

백옥반 가운데 앵두를 가득 담아 근시에게 올리노니

(白玉盤中滿盛櫻桃呈近侍 백옥반중만성앵도정근시)

황금 술잔 속에 좋은 술 가득 따라 사신에게 권합니다.

(黃金杯裏盈斟美酒權使星 황금배리영짐미주권사성)

앵두는 불같이 붉고

(櫻桃紅似火 앵도홍사화)

버들은 연기처럼 푸릅니다.

(楊柳翠如煙 양류취여연)

1470년 5월, 이전 해에 승하한 예종의 고명(誥命ㆍ중국 황제가 조선 임금 즉위를 승인한 문서)과 제문(祭文ㆍ죽은 왕을 위로하는 글)을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 강호와 조선의 통역사 김맹경이 서로 화답하며 지은 시다. 앵두를 본 강호가 김맹경에게 더불어 시를 지어보자고 청했는데, 김맹경이 글을 잘 모른다며 거절하다가 강호가 먼저 시를 읊으니 김맹경이 답했다. 강호는 술을 잘 마셔 조선 사람 중에서 대작할 이가 없을 정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마도 김맹경과 함께 있던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흥이 올라 앵두를 보고 시를 짓자고 한 것 같다. 5월이면 앵두가 한창일 테고, 앵두는 중국 화북 지방이 원산지이므로 아마도 익숙했을 것이다.

앵두가 우리나라에 언제 처음 심어졌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다만 성종 때 간행된 ‘동문선’에 통일신라시대의 문장가 최치원이 임금이 내려준 앵두에 대해 올리는 감사의 글(謝櫻桃狀ㆍ사앵도장)이 실린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 같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봄에 맺힌 한 줄기져 흐르다(春恨脉脉 춘한맥맥)'. 담벼락을 따라 올라 온 가지가 앵두나무다. 간송미술관 소장

앵두는 꾀꼬리가 먹으며 생김새가 복숭아와 비슷하기 때문에 앵도(櫻桃)라고 부른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함도(含桃), 차하리, 천금, 애밀(崖蜜)이라고도 부른다. 봄이면 잎보다 먼저 옅은 분홍색을 띠는 흰색 꽃이 피고, 초여름에 손톱만한 붉은 열매가 익는다. 허균의 ‘도문대작’에 영동 지방에서는 하얀색 열매가 맺기도 한다고 기록돼 있다.

앵두는 당시 흔히 보이는 과일 중 가장 먼저 익었기 때문에, 조선 왕실에서는 종묘에 올리기도 했다. 계절에 따라 새로 난 과일이나 곡식을 조상의 혼에게 올리는 의식을 천신(薦新)이라고 하는데, ‘세종실록’ 오례나 ‘종묘의궤’에 보면 앵두는 5월에 살구와 더불어 변(籩)이라는 제기에 담아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앵두와 살구 등을 담아 조선 왕실 제사에 올렸던 '변'. 변은 물기가 없는 마른 제수를 올릴 때 사용한다. 대나무를 잘게 쪼개 엮어 장구형으로 만들었다. 현존하는 변 중에는 그릇과 굽이 대칭되어 연결된 형태도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앵두나무는 햇빛만 잘 받으면 특별히 가리는 토양 없이 잘 자라므로 배수가 잘 되는 곳에 심는다. 그래서 예전에는 우물가에 많이 심었다. 지금도 궁궐에 가보면, 금천(禁川ㆍ궁궐 정문 안에 흐르는 명당수) 주변에 앵두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의 임금 중 이 앵두나무를 직접 심은 분이 있으니, 바로 세종의 아들 문종이다.

문종이 앵두나무를 직접 심었다는 내용은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 실려 있다. 세종이 일찍이 앵두를 좋아해 문종이 세자 시절 손수 앵두나무를 심어 지금의 궁궐 안에 앵두나무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또한 ‘문종실록’과 ‘중종실록’에 보면 문종이 궁궐 후원에 앵두나무를 심은 뒤 손수 물을 주고 길러 익기를 기다려 열매를 올리니, 세종이 이를 맛보고 밖에서 올린 것과 세자가 직접 심은 것은 같을 수 없다고 기뻐했다는 내용도 실려 있다. 왜 문종은 직접 앵두나무를 심고 가꾼 것일까. 이는 세종의 질병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춥고 더운 날이라도 밤을 새워 글을 읽는다며 아버지인 태종이 칭찬할 정도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랏일도 마찬가지로 열심이어서 훈민정음 창제, 오례의 정비, 4군 6진 개척 등 굵직굵직한 주요 업적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공부벌레이자 일중독자였던 세종은 과중한 업무와 운동 부족, 만성피로와 스트레스로 몸에 병을 줄줄이 달고 살았다.

세종의 나이 43세 때인 1439년 6월, 그가 강무(講武ㆍ임금이 직접 거행한 사냥 중심의 군사 훈련)를 세자에게 위임할 것을 대신들과 논의한 내용을 보면 세종의 건강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세종은 젊어서부터 한쪽 다리가 10년 정도 아팠고, 등 부종 탓에 잘 돌아눕지도 못하였다. 또한 소갈증을 앓게 된 지 열 서너 해가 됐고 그로 인해 눈이 아파 사람이 있는 것만 알 뿐 누구인지 분간하지는 못하는 지경이었다.

소갈증은 오늘날의 당뇨병으로 여러 합병증이 동반되는 질환이며 목이 타는 듯 마르는 증세가 나타난다. 세종은 소갈증을 앓아 하루에 마시는 물이 한 동이가 넘었는데, 이러한 세종의 증상에 제격인 과일이 바로 앵두다. 갈증은 화와 열을 다스려야 해소가 되는데 앵두가 적격이다. 주성분이 포도당과 과당이며 사과산 같은 유기산이 많이 함유돼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수분대사를 활발하게 하는 덕이다. 그래서 ‘동의보감’에는 앵두가 폐기능을 도와 호흡을 편하게 해주고 소화기능을 도와 혈색을 좋게 한다고 쓰여있다. 게다가 피로회복에도 효과가 있으니, 소갈증 환자였던 세종에게 앵두는 안성맞춤인 과일이었다.

고증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앵두편. 한국요리와문화연구소 제공

앵두는 단오 즈음에 익기 때문에, 단오 때 절기 음식으로도 많이 먹었다. 앵두화채, 앵두수정과 같은 음료로 즐기기도 했지만, 알이 작고 씨가 커서 과육이 별로 없기 때문에 앵두편으로 주로 만들어 먹었다. 앵두편을 만드는 방법은 크게 2가지가 있다. 첫째는 장계향의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방법으로 씨를 발라 살짝 데친 앵두를 체에 걸러 꿀을 붓고 졸여 엉기게 하는 것으로 설탕을 넣어 조린 서양의 꿀과 비슷하다. 둘째는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에 나오는 방법으로 꿀 대신 녹말을 풀고 되게 졸여서 엉기게 하는 것으로 동물의 껍질에서 얻은 젤라틴을 넣어 굳힌 서양의 젤리와 비슷하다.

이렇듯 과즙에 꿀이나 녹말을 넣고 졸여 굳힌 음식을 과편(果片)이라고 하는데 궁중에서는 병(餠)이라 불렀다. 과편은 당분과 펙틴, 유기산이 들어 있는 과일로 만들어야 하며 새콤달콤한 맛이 난다. 또한 색이 아름다워 궁중 잔치에 행사용 음식으로 사용하거나 후식으로 애용되었다. 특히 여름에는 생과일이나 열매에 꿀을 넣고 조린 정과를 만들면 눅으므로 과편을 더 많이 만들어 썼다. ‘일성록’ 속 1796년 6월 정조가 자궁(혜경궁 홍씨)께 직접 표리를 올리고 진찬을 행할 때 앵두편을 바친 내용은 이를 잘 보여주는 예다.

순조 비 순원왕후가 막내 딸 덕온공주가 죽은 다음 해인 1845년(을사년) 2월 망전에 보낸 음식 목록이다. 망전은 죽은 이를 위해 매달 음력 보름 아침에 지내는 의식을 말하는데, 앵두편(앵두병)이 올려졌음을 알 수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유기산이 들어 있어 신진대사를 도와주고 펙틴이 들어 있어 장건강도 도우며 칼슘이 들어 있어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을 주는 앵두를 편으로 만들어 먹으면 색도 예뻐 보기 좋고 먹기도 편했을 것이다.

앵두 덕분이었을까. 세종은 53세의 나이로 여덟째 아들 영응대군의 집에서 승하했는데 조선시대 임금 27명의 평균 수명이 45.1세임을 감안한다면 비교적 오래 산 셈이다. 그러나 욕심은 금물이다. 앵두는 화성(火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너무 많이 먹으면 탈이 나기 쉽다.

최나래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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